성탄절은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은 평강(샬롬)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찬양한 수많은 천군 천사들은 하늘엔 영광이요 땅에서는 평화라고 노래했습니다. 평화는 화해에서 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 막고 있는 죄의 담이 허물어 질 때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화는 우리의 죄를 속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질고를 지시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고 우리의 허물 때문에 우리의 죄악 때문에 징계를 받은 것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받았습니다.(이사야53:5)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습니다.(고후5:18) 그러므로 하나님의 평화는 나의 부족함과 범죄 함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속죄의 십자가의 사랑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웃과의 평화도 그렇습니다. 인정과 용서, 그리고 용납이 평화의 핵심입니다. 이 세상은 나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 생각만 옳은 것도 아닙니다. 나만 완벽하고 허물없는 것이 아닙니다. 내 곁에 형제가 있습니다. 가족이 있습니다. 친구와 성도들이 있습니다. 직장의 동료들도 있습니다. 이웃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과 관계하면서 때로는 갈등을 느끼기도 합니다. 남이 원망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리면 평화가 깨어지고 긴장이 있게 됩니다.

이웃과 평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peace maker)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어집니다. 평화를 만들려면 먼저 상대방 존재를 인정하여야 합니다. 존재를 인정할 때 그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상대 존재를 인정할 때 그들이 혹 나에게 해를 끼쳤더라도 용서하고 용납할 수 있게 됩니다. 아내와 남편의 존재를 인정할 때 혹 허물이 있더라도 나의 남편이요, 나의 아내이기 때문에 힘써 용서해야 하고 용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도 허물이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용서하기 어려운 상대의 결정적인 실수도 사랑으로 덮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않고 종의 형체를 가지고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의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2:5) 예수님이 화목제물로 이 땅에 오신 것이 예수님의 겸손입니다. 성탄절에 예수님의 겸손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내가 너무 강하면 상대방을 무시하게 됩니다. 내 주장하는 소리가 크면 상대방의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낮아지면 상대방이 보입니다. 내 소리가 아주 작을 때 상대방의 음성이 들리게 됩니다. 아예 내가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하면 상대방의 숨소리 까지 들을 수 있습니다.

이 시대는 너무 자기 소리가 큽니다. 나라 전체도 시끄럽습니다. 진보와 보수의 소리도 확성기를 통해 차가운 거리를 쩌렁거리며 울리고 남을 선동합니다. 상대편의 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대신 정죄합니다. 남북한의 화해와 통일무드를 정부는 언론을 통해 흘립니다. 국민 누구도 평화와 통일을 마다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이 먼저 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 후 남북의 화해와 통일이 이루어져야 할 탠데 그러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적폐를 청산한다고 하면서 또 많은 적들을 만들며 화해와 화평을 만들지 못하는 현 정세를 볼 때 예수님이 주시는 평강이 이 성탄에 임하길 간절히 바라게 됩니다.

크리스마스는 모든 사람의 마음이 들떠있고 기대하는 절기입니다. 성탄에 꾸미는 크리스마스트리의 불빛이 사람들의 어두운 마음을 밝히면 좋겠습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시는 참 빛이십니다. 교회를 장식하고 있는 성탄의 불빛을 보면서 우리 마음속에 예수님의 빛을 담읍시다. 그 빛은 예수님의 사랑의 빛, 나의 마음 속을 뜨겁게 하는 사랑의 빛입니다. 그 빛을 경험한 우리는 이웃을 향해 용서와 화해그리고 평화를 만드는 불을 밝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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