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회장/박영호 목사 - 제70회 총회 개회예배 설교 요약(로마서 12장 1-15장 13절)

▲총회장 박영호 목사(창원새순교회)
▲총회장 박영호 목사(창원새순교회)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지금 처해 있는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예배’입니다. 세계적 유행이 되어버린 코로나 19 바이러스 감염증 때문에 국가마다 조금 다르긴 하겠지만 교회에서 공적으로 모여 하는 예배를 세상 정부가 간섭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대면 예배’, ‘비대면 예배’라는 신조어가 생겼습니다. ‘비대면 예배’라는 말은 성경과 역사 그 어디에도 쓰이지 않았던 말입니다. 정부가 대면 예배는 ‘금지’, 비대면 예배는 ‘허용’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 올리는 예배를 정부가 ‘금지’, ‘허용’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성도들과 이웃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공적 예배로 모일 수 없는 상황과는 다른 표현입니다. 코로나19 상황에서 교회가 모여서 예배할 것인가? 모이지 않고, 성도들이 개인적으로나 가정에서 가족들이 예배하도록 할 것이냐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분명한 것은 예배가 정부와 일부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공격을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주로 주일 예배당에서 모여 형식을 갖추어 순서를 진행하는 예배를 ‘예배’라고 불러 왔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이 주일에 모여서 하는 예배에 목숨을 걸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공적 예배를 소중히 여기는 유산을 물려주셨습니다. 물론 그 주일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 어떤 경우에도 교회가 포기할 수 없는 생명과 같은 진리임을 성경과 교리는 충분히 말해 줍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1장). 그러나 또 다른 예배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높이는 예배자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사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주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 15:22-23).


여기 구약교회에서 말하는 ‘번제’와 ‘다른 제사’는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번제와 다른 제사가 형식을 갖추어서 하는 예배라면 주님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은 형식 예배를 넘어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예배를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로마서 12장 1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자기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합당한 예배’, ‘영적 예배’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영적 예배’에서 ‘영적’이란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기켄’(λογικὴν)은 다양하게 번역되었습니다. 문자대로는 ‘논리적인 추론 능력에 속한’, ‘이성적’, ‘합리적’이라는 뜻입니다. KJV은 ‘이성적’(reasonable), NASB, NIV, RSV는 ‘영적’(spiritual)으로 번역했습니다. 새번역은 ‘합당한’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로기켄은 이성적(理性的)이란 말이 아니라 베드로전서 2장 2절에서 ‘말씀’에 해당하는 ‘로기콘 갈라’(λογικὸν γάλα)를 ‘신령한 젖’으로 번역한 것처럼 ‘영적’이란 뜻입니다.


바울의 첫 번째 권면 :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2:1)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해서 인신 제사를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예배는 ‘영적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산 제물이 되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의 내용과 태도가 중요합니다. 예배자가 공적으로 하나님을 높이기 위해 예배로 모였을 때나, 삶에서 하나님을 높이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기쁨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이 기쁨으로 받으시는 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서 “항상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살전 5:16)고 했습니다. 로마 황제의 재판을 기다리던 로마의 옥중에서 빌립보 교회에 쓴 편지에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의 생애와 십자가를 지신 일도 육체적인 고통만이 아니라 기뻐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행하셔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산 제물이 되셨습니다. 바울의 두 번째 권면 :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12:2).

바울은 본 절에서 두 가지를 간절히 권면합니다. 먼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뜨지 말라’는 것이고, 다음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이들 두 가지가 1절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 예배’의 설명입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마음이 새롭게 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산 제물이 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로마서에서 성도가 본뜨지 말아야 할 이 세대는 어떤 모습일까요? 불신앙과 우상숭배와 부도덕이 가득한 세상입니다(롬1:18-31). 지금 한국에서 우리가 느끼고 경험하는 세상은 하나님과 주님의 몸인 교회를 업신여깁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어 섬깁니다.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는 세상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를 죄라고 인정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로마제국이라는 세상이 그랬던 것처럼 로마서 1장 26-31절에서 정죄하는 죄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세례를 받은 이로서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을 하지 않고, 우리 몸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산 제물이 되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합당한 예배는 무엇입니까?


첫째, 교회 안에서 서로 섬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산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12:3-13).


먼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해야 합니다(3절). 마음이 새롭게 되어야 근본적인 변화가 가능합니다. 생각으로 하는 가치관과 세계관의 변화 없이는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서 지체임을 알아 서로 섬겨야 합니다(4절).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서 모든 성도가 서로 섬기도록 각 사람에게 다른 은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사만이 아니라 서로 섬길 수 있는 직분까지 주셨습니다. 모든 성도는 각 사람이 이 은사와 직분을 가지고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서로를 섬겨 산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많은 교회가 성도들로 하여금 받은 은사를 무엇인지 알게 해 주지 않습니다. 은사는 아는데 직분과 연결시켜 봉사하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자기가 받은 은사가 무엇인지, 각 사람에게서 주어진 직무와 연결시켜서 봉사해야 합니다. 개체 교회나 총회에서 하는 봉사가 은사와 전혀 상관없이 진행되는 것을 말씀에 비추어 새롭게 검토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 형제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산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12:9-13).


성도는 거짓 없는 사랑으로 형제를 대해야 합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9절).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해야 합니다(10절). 이는 서로를 바라보았을 때 상대방이 나를 존경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11절).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써야 합니다(12절).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써야 합니다(13절). 이것이 세상을 본뜨지 않는 변화된 삶의 영적 예배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형제라고 부를 수 있는 성도들이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합당한 예배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셋째, 이웃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높이는 생활을 통해 산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12:14-21).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고통을 주는 이웃까지도 어떻게 대할 것인지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너희는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합니다(14절). 핍박을 받으면서 축복하는 것은 인간의 감정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축복하라’, ‘축복하라’를 거듭 말합니다. 예수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고 말씀하셨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합니다(15절). 우리 곁에는 언제나 이들 두 부류의 사람들, 즐거워하는 이들과 우는 이들이 있습니다. 성도는 그들의 형편과 처지를 따라 공감해 주어야 합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아야’ 합니다(16절). 세상에는 늘 높은 데 마음을 두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성도는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겸손해야 합니다. 오히려 낮은 곳에 처해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행하도록 힘써야 합니다(17절). 악으로 악을 갚는 것이 이 세상의 존재 방식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런 면에서 이 세상을 본뜨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애정을 가지고 권면을 계속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겨야 합니다’(19절). 원수를 개인적으로 대하지 말고 공권력에 맡겨야 합니다(13:3-5). 하나님께서도 친히 원수를 갚아주시겠다고까지 하시면서 우리가 갚은 악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원수를 갚지 않는 소극적인 태도에서 멈추지 말고 적극적으로 원수에게까지 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고 합니다(20절). 우리가 원수에게 적극적인 사랑을 베푸는 데도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기 머리에 숯불을 쌓는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21절). 21절은 이 단락의 절정입니다. 악이 가득한 세상,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 세상은 악으로 가득합니다. 그 가운데서 살고 있는 성도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불어야 할 승리의 나팔입니다. 성도가 악을 이겨내는 것을 보면서 세상은 교회를 소망으로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넷째, 성도는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영적으로 깨어 있어 산 제물이 되는 예배자로 살아야 합니다(13:1-14).


바울은 로마제국이 세상을 다스리던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세상 정부에 대한 바른 태도를 가지라고 권면합니다. 성도는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국가라는 권위구조를 만든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속 정부에 대해서 바른 태도를 가져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세계를 경영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다스리는 이를 대할 때 권세를 주신 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13:1-5). 그리고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마땅히 조세와 관세를 부담하여 납세자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13:6-7). 왜냐하면 세금이 국가 경영에 꼭 필요한 것이고, 세금을 냄으로써 세속 국가를 통한 하나님의 세계 경영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경영하신 여러 증거들을 보여 줍니다(사 10:5-6, 렘 27:6, 사 44:28, 스 1:1-2, 단 11장, 눅 2:1-6). 이 모든 지식을 가진 바울이 권면한 대로 성도가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것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 예배를 분리시키면 안 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말라.’ 우리는 구약과 신약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율법을 행함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사람이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이 율법의 완성입니다(13:8-10).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율법과 선지자가 가르치는 모든 것이 매달려 있습니다(마 22:34-40).


종말을 기다리는 성도는 자기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산 제물이 되기 위해서 깨어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이야말로 이 세대를 본뜨지 않는 변화된 예배자로서 새 삶을 사는 것입니다(13:11-14).


다섯째 더 약한 성도들을 도와줌으로 산 제물이 되는 예배자로 살아야 합니다(14:1-15:13).


음식 문제로 믿음이 연약한 이를 비판하지 말고 받아 주는 공동체를 세워가야 합니다. 모든 것을 주님 중심으로 해야 합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입니다(14:1-8).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14:17). 믿음이 강한 이가 믿음이 약한 이의 약점을 담당해야 합니다. 이웃을 기쁘게 하여 교회를 세우는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우리도 서로 받아 주어야 합니다(15:7). 유대인 신자이든 이방인 신자이든 화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15:8-9).


형제 여러분!

우리 자신을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 생활에서 하나님을 최고로 높이는 예배자로 살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대를 본뜨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합당한 예배’, ‘영적 예배’는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예배당에 모여서 하는 예배를 생명같이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삶의 현장에서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받은 은사를 가지고 서로 섬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산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12:3-13). 형제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산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12:9-13). 이웃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높이는 생활을 통해 산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12:14-21).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깨어 있는 삶을 통해 산 제물이 되는 예배자로 살아야 합니다(13:1-14). 더 약한 성도들을 도와줌으로 산 제물이 되는 예배자로 살아야 합니다(14:1-15:13).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산 제물이 되는 영적 예배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높이는 삶을 살 때 가능합니다.


40년을 설교했으나 변하지 않는 구약교회 성도들을 보면서 예레미야는 기도를 바꾸었습니다. “여호와시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애 5:12).


사도 바울이 본문을 통해서 쏟아낸 명령형의 수많은 청원을 들으면서 우리 힘으로 변화를 받고 새롭게 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산 제물로 드려지는 영적 예배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삼위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자로 살도록 하시기 위해 일하실 때만 가능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변화된 예배자로 살기 위해 바울처럼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가 합당한 예배, 영적인 예배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때 이 땅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하게 될 것이고 세상은 교회 때문에 소망을 갖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희망의 아이콘이 될 수 있습니다. 원수들을 향해서도 축복하고, 끝까지 선으로 악을 이겨내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이웃(교회 안팎)을 사랑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 제물이 됩시다. <총회장 박영호 목사/창원새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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