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 그리던 그 교회의 모습! 이렇게 되찾다!

무슨 일을 하든지 거기에는 치밀한 전략과 계획이 필요한데, 목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하지만 목회는 사람의 생각으로 되는 게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 역사하심이 아니면 어렵다. 왜냐하면 사람이 아무리 계획할지라도 그 길을 인도하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첫 번째 계명인데, 나는 그 절대적 계명 앞에 늘 자신이 없었다. 교회가 아무리 전도전략을 잘 세운다 해도 설교가 따르지 않고, 교회 운영에 은혜가 없다면, 교회는 자라나지 못한다. 한때 이것만 극복하면 될 것 같은 마음에 열심히 방법을 찾아다닌 적이 있었다. 방법론은 참 좋았는데, 우리 교회에는 그대로 안 되는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교회의 문제! 누구에게 있나?
초장기 우리 교회는 초라하니 뭐 하나 좋은 게 없어 보였다. ‘이 바닥을 어떻게 돌파할까.’ 궁리하던 끝에 알게 된 놀라운 진리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 고민의 결국이 ‘나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아, 결국 내 문제였구나’ 이 깨달음이 피부로 와 닿고 실천으로 옮겨질 때 비로소 문제가 열리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교회개척 초기, 내게는 전도자도 없었고, 양육할 리더도 없었다. 설교는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도 회중의 반응은 싸늘했다. ‘늘 목회를 바쁘게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어째서 이렇게 바닥인가’ 고민하던 가운데 금식기도에 들어갔다.
시름시름 주저앉아갈 무렵 아주 근본적인 문제를 깨닫게 하셨는데, 그것은 바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였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스럽게 여기는 것이 나에게 있다는 깨달음이다. 그런데 내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존재가 바로 아들이었다. 사진을 품고 다니면서 보고 또 봐도 싫증나지 않는 게 아들 사진이었다.
반면 하나님은 그저 멀리 계신 분이고 나의 필요를 도와주시면 좋을 신(神) 정도였다. 하지만 기도 중에 아비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지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 이 계명의 강도가 우리 생각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음을 절감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렀다. 그때 내가 정말 사랑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아들이었다. 마음으로부터 정리가 쉽지 않아 금식도 하고 기도도 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들과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면서 살려고 결심까지 했다.

갑자기 태도를 바꾸고 마음에 없는 거리감까지 만들었다. 어떻게 하든 하나님을 사랑하고 제일 우선에 두는 삶을 살아보려고 무척이나 몸부림쳤다. 마치 하나님을 시험하듯이 ‘하나님 제가 이렇게 합니다. 저 좀 도와주세요. 저 좀 봐 주세요’
그때 시험당한 아브라함을 생각해봤다. 그는 모리아산에 아들을 바치러 갔다.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창 22:6~7)
앞이 꽉 막혀 길이 보이지 않던 시절, 이 기막힌 상황을 아브라함 입장에서 묵상하고 또 묵상하였다. 이 이야기를 지금 돌아보는 것은 이 벽을 넘고 나서야 목회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들이냐? 예배냐?
아들을 데리고 시골 다른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릴 때였다. 어린아이가 없는 교회였는데, 예배 중 갑자기 회중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강단에서 뭔가 하고 둘러보는데 아들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게 아닌가. ‘어’ 하고 일어서려다가 언뜻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나는 지금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이 예배 시간에 아들을 도우러 가는 게 옳은가, 예배를 드리는 게 옳은가?’
그 순간은 생명을 건 절박한 결단의 시간이었다. 운명 같은 선택의 순간 ‘주님, 예배를 지키겠습니다. 주님만을 사랑합니다. 저 아이의 생명을 주님께서 지켜주소서’라고 고백했다. 말은 쉽고 간단하지만, 그 순간은 정말 길고 길었다. 예배는 긴박하게 끝났고 아들은 누군가에게 안겨 예배당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때 스쳐 가는 음성이 있었다. “아들을 거꾸로 들라. 아들의 입에 손가락을 넣어보라. 아들의 등을 힘껏 두드리라” 경황없는 그 순간 내 마음에 울려온 음성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몰랐지만 그렇게 따라하였다. 아들은 입술이 하얗게 되고 부르르 떨면서 숨이 멎어 있었다. 입을 간신히 벌리고 손가락을 목구멍 속으로 깊이 밀어 넣었다. 뭔가 손가락 끝에 걸리는 것 같았다. 힘을 다해 찔러 버렸다. 그 순간 목에서 뭔가가 튕겨 나왔고 피가 왈칵 쏟아졌다. 동전에 목이 막힌 것이었다. 그렇게 아이가 살아났다.
시험을 그렇게 하셨다. 지금도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요한복음 21장을 기억하며, 주님을 제일로 사랑하는 마음을 늘 잊지 않으려 힘쓰고 있다.
사역하다가 느슨해질 때면 스스로 마음을 조인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절대 내게 있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날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렇게 살다 보니 아픔도 많고 주변에서 야속하단 원망도 많이 듣는다. 하지만 이 길이 최선의 길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이스라엘의 왕을 세우기 위해 이새의 집에 찾아갔다. 이새는 아들들을 정결하게 단장해 사무엘 앞에 세웠다. 사무엘이 장남 엘리압을 보자 마음에 감동이 됐고 기름을 부으려 하였다. 그때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 16:7)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말씀인가. 용모와 키, 겉모양, 조건은 그럴듯한데 하나님께서 이미 그를 버리셨다고 하신다. 다윗을 데려오자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고 했고, 다윗은 그날 이후로 여호와의 영에 크게 감동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
1997년 교회개척 초기 하나님이 늘 나를 보고 계시며 나를 달아보신다는 생각에 늘 가슴이 서늘해졌다. 내가 좋다고 좋은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길을 가야 한다는 생각이다. 지금도 자신이 없는 부분이다.
도대체 하나님은 다윗의 어떤 부분을 그렇게 마음에 들어 하셨단 말인가? 궁금하였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행 13:22) 그렇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던 사람이었다. ‘목회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받아 섬기는 일이다. 혹시 내 맘대로 하고 있지는 않은지. 사울 왕처럼 자기 좋은 대로 사람들 인기를 기대하며 설쳐대고 있지는 않은지.’ 항상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살게 하셨다.
다윗의 어떤 부분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되었는지를 묵상하다가 사무엘상하 말씀을 3년간 주일예배 때에 설교를 했다. 지금까지 설교하면서 그때만큼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주중엔 자정이 되도록 전도하는 날이 많았다. 늦은 밤 강단에 엎드리면 가슴 깊은 곳에서 벅찬 기쁨과 감사가 차올랐다. 몸은 피곤한데 영혼이 새로워지는 기분이었다. 미천한 전도자인데도 매주 말씀이 기대됐고 기다려졌다. 신비한 은혜의 시간이었다.
토요일은 전도한 사람들을 챙기다 보면 밤이 됐고 설교준비는 그때부터 시작했다. 거의 날을 꼬박 새우고 눈이 뻑뻑한 가운데 피로 속에 주일 새벽 설교를 했다. 그리고 녹초가 된 몸으로 주일예배 강단에 올랐다. 그런데 하나님은 설교시간 내내 내가 말하는 것 같지 않은 분위기를 늘 느끼게 하셨다.
당진동일교회는 그 말씀을 전하는 가운데 매달 세례를 베푸는 축복을 누리게 하셨다. 정말 많은 성도가 전도되어 교회로 나왔고 첫 신앙인데도 거의 정착하게 되었다.
다윗은 왠지 미덥지 않은 아들처럼 보였다. 아버지는 늘 그렇게 다윗을 대하고 있었다. 이번엔 전쟁에 나간 아들들의 소식이 궁금한 아버지가 다윗의 손에 도시락을 들려 심부름을 보낸다.
성경은 그 상황을 이렇게 기록한다. “이새가 그의 아들 다윗에게 이르되 지금 네 형들을 위하여 이 볶은 곡식 한 에바와 이 떡 열 덩이를 가지고 진영으로 속히 가서 네 형들에게 주고 이 치즈 열 덩이를 가져다가 그들의 천부장에게 주고 네 형들의 안부를 살피고 증표를 가져오라.”(삼상 17:17~18)
아버지의 믿음은 다윗보다 증표에 더 비중이 있었다. 그런데 다윗은 아침 일찍 일어나 양치는 사람들에게 양을 부탁하고 길을 떠난다.(삼상 17:20) 다윗의 특별한 책임감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그리고 전장에서 골리앗을 보고 이렇게 외친다.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32절) 모든 사람이 다 살겠다고 숨어버리는 그 현장에 심부름 간 소년이 싸우겠다고 나선 것이다.
소년의 눈에 골리앗은 키가 크고 장대한 싸움꾼이었지 장수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대적자일 뿐이니 주의 종이 가서 싸우겠습니다!”라고 한 것이다. 다윗의 중심을 여기서 볼 수 있는데,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책임지고 사는 사람이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의 자세 아닌가! 사람도 믿을 수 없는 사람에겐 일을 맡기지 않는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믿을 수 없는 사람에게 나라를 맡기시겠는가. 하나님은 사람을 찾으시되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찾으신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책임지며 살고 있는가? 그 이름값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부끄럽고 죄송하고 창피했다. 초라한 내가 교회 이름을 들고 서 있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내 앞에는 한없이 가난하고 연약한 성도들만 있었다. ‘이들을 어떻게 책임질 수 있단 말인가? 주님의 존귀하신 이름이 나 때문에 땅에 떨어지고 있지는 않은가?’
“초라한 제 모습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저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혹시 제가 가난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할까 두렵고 우리가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다’ 할까 두렵습니다.”
이 기도를 새벽마다 부르짖었다. 그리고 교회 간판 위에 작은 글을 써 붙였다, ‘위대한 교회 건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 문구를 바라볼 때마다 마음의 각오를 다잡았다.
이수훈 목사(당진동일교회) / 구본철 기자(정리)

저작권자 © 고신뉴스 KNC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