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오해(1)

로마서 117절에 근거한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는 종교개혁을 통해 재발견된 기독교 교리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이라는 구호는 16세기 이후 이신칭의 교리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루터가 가르친 이신칭의 교리의 핵심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교리를 위한 핵심 성경구절은 이렇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1:9).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2:16). 그런데 오늘날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가르침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저절로 성인군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인 성인군자는 믿음 안에서 율법을 지키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첫 번째 오해는 오직 믿음의 교리가 사람의 선행을 배제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런 오해는 신약 신학자들 특히 새관점 학파로 알려진 샌더스, 제임스 던, 그리고 톰 라이트 등의 엉뚱한 주장을 통해 반복됩니다. 단 한 번의 참된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한 번의 믿음으로 구원의 모든 것을 한꺼번에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이루어가야 할 구원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열매인 선행을 구원과 무관한 것으로 여길 때 이신칭의 교리는 개신교의 새로운 교리적 면죄부로 변질되기 십상입니다. 이것이 예수천당이라는 구호의 폐해입니다.

성경은 믿음과 선행을 구분하지만, 분리하지는 않습니다. 야보고서는 믿음을 두 종류, 즉 행함이 있는 믿음과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구분하고 행함이 없는 믿음그 자체가 죽은 것이요, ‘귀신들도 믿고 떠는 종류의 헛것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리고 결론 내리기를,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2:22-24). 이처럼 구원하는 믿음은 성화로 간주되는 인간의 모든 선행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믿음의 신자라면 반드시 선행이라는 삶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선한 나무는 선한 열매로 알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 교리를 발견한 루터는 야고보서의 행위로 받는 구원이 바울 사도의 가르침과 조화되기 어려운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가 정경이라는 사실이 몹시 못마땅하여 지푸라기 서신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가르칩니다. 루터조차도 단 한 번의 믿음으로 구원의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구원받은 신자의 상태를 겨우 죽을 고비를 넘긴 중환자에 비유하면서 믿고 구원받는 그 순간부터 영혼의 의사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철저하게 순종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오직 믿음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공로만이 인간의 구원을 위한 유일하고 충분한 가치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그리스도의 공로 외에 다른 어떤 전제 조건 없이 죄인인 우리를 의롭게 만드십니다. 즉 구원이란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결과이지, 인간의 어떤 선행을 조건으로 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2:8). 이 말씀이 이신칭의 교리의 핵심 내용입니다. 믿어서 의롭게 되는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다. 따라서 구원을 위한 자랑거리는 십자가 외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스트라스부르 종교개혁자 부써와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칼빈은 칭의와 성화의 분리 현상을 개탄하면서 반대했던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칼빈에 따르면 칭의와 성화는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 없이는 결코 다른 하나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칭의가 앞서는 원인이고 성화는 뒤따르는 결과이며, 이러한 원인과 결과의 역순은 결코 성립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화를 인간의 선행으로 정의한 칼빈은 칭의와 성화가 반드시 구분되어야 하겠지만 결코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선행 즉 성화가 따르지 않는 칭의는 없습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신자의 삶은 반드시 선행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신칭의 교리의 시조 루터조차도 열매 없는 믿음, 즉 성화 없는 칭의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행위가 뒤따르지 않는 믿음을 가공된 믿음즉 죽은 믿음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루터가 염려하고 격렬하게 반대한 것은 칭의와 성화를 뒤섞어버림으로써 마치 구원이 하나님과 사람의 합작품인 것처럼 가르친 중세 천주교의 구원 교리 즉 신인협동설이었습니다. 루터는 구원을 사람의 어떤 공로도 포함되지 않고 순수하게 그리스도의 공로 덕분에 받아 누릴 수 있는 것이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자들이 가르친 이신칭의 교리, 즉 오직 믿음으로만, 오직 은혜로만 구원 받는다는 교리는 결코 사람의 선행 즉 성화 교리를 배제하지 않습니다.

황대우 교수 / 고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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