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삽화: 구본철 화백
▲ 삽화: 구본철 화백

감리교회의 창시자로 알려진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는 목사의 아들이었단다. 그는 19명의 형제자매 가운데 15번째였고 8명의 형제가 어릴 때 죽었다고 해. 존 웨슬리는 7살 때 집에 화재가 났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남았지. 그는 1720년 18살 때 옥스퍼드(Oxford) 대학에서 신학을 시작해 나중에 목사(1728)가 되었단다. 동생 찰스 웨슬리도 6년 뒤 같은 대학에서 공부했지. 존 웨슬리는 1729년 옥스퍼드 조교수로 오면서 동생이 만든 ‘신성 동아리’(Holy Club)를 책임 맡았단다.


두 형제는 동아리를 아주 엄격하게 운영했어. 매일 일정표를 만들어 지켰지. 금식도 하고 책을 읽으며 불쌍한 죄수들을 방문하기도 했어. 매주 동아리 안에서 성찬식을 거행하고 오락을 금하고 사치를 죄악시했지. 바로 그 동아리에 나중에 유명한 설교가가 된 조지 휫필드(J. Whitefield)도 참여했단다. 당대 친구들은 그들을 ‘규칙장이들’(method+ist)라 불렀어. 일종의 별명이었지. 그들의 엄격한 신앙적 삶과 규칙(method)을 비꼬며 놀리는 말이었단다.


하지만, 그 별명에서 감리교의 영어식 이름, ‘메소디스트’(The Methodist)가 생겨났지. 또 다른 이름은 ‘감리교’(Episcopal Churches)인데 그 교회의 정치적 특징을 나타낸단다. 장로교회가 장로정치를 하듯, 감리교회에서는 감독정치를 하는 특징을 표현한 거야. 이렇게 교회정치 형태로 만들어진 이름으로 ‘독립교회’, ‘회중교회’, ‘장로교회’ 그리고 ‘감리교회’가 있지.


1735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웨슬리 형제는 신성 동아리 회원들과 아메리카 조지아(Georgia) 주(州)에 선교 여행을 떠났단다. 대서양을 건너는 항해는 폭풍으로 거칠었어. 그 배에는 26명의 모라비안 형제단이 함께 타고 있었지. 웨슬리 형제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단다. 그들은 폭풍 가운데서도 너무나 평화로웠어. 두려워하기는커녕 찬송을 불렀지. 웨슬리 형제는 자신들이 추구해온 성화의 삶이 폭풍 속에서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어. 대화 가운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신비한 경험을 했단다.


아메리카에 도착해 두 형제는 모라비아 형제단을 찾아갔어. 한 모라비아 형제단이 존 웨슬리에게 물었지.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압니까?” 존 웨슬리는 대답했지. “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의 구주라는 것을 압니다.” 그가 다시 물었단다. “그것은 진리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당신의 구주이신가요?” 존 웨슬리는 충격을 받았어.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그렇게 물어본 사람은 없었던 거야. 그 질문은 3년 동안이나 웨슬리를 괴롭혔단다. 조지아에 머물며 웨슬리는 열심히 선교했어. 그는 언어도 능숙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태리어와 영어로 설교할 수 있었지. 하지만 선교의 열매는 좋지 않았단다. 동생 찰스 웨슬리는 질병 때문에 먼저 영국으로 돌아가고, 1738년 존 웨슬리도 고국 잉글랜드로 돌아왔지.


그들의 뉴잉글랜드 선교는 한 마디로 실패였단다. 존 웨슬리는 목사가 된 후 거의 10년 동안 죄와 싸웠고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했지만, 성공적이지 못했지. 그는 고뇌했단다. 그는 ‘죄로부터 자유를 얻은 것은 성령의 증거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이며, 신앙에 의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행함으로 얻은 것이야.’라고 생각했어.


1738년 5월 24일 두 형제에게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단다. 존 웨슬리는 엘더스게이트 거리(Aldersgate Street)에 있는 모라비아 형제단의 모임에 참석했어. 그 모임은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고 있었지. 그 말씀을 듣고 있던 존 웨슬리는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 믿어지고 구원에 대한 확신이 들었다고 해. 그 시간이 정확히 저녁 8시 45분이었지. 그는 그것을 중생의 순간으로 이해했단다. 삼일 후 동생 찰스도 똑 같은 경험을 했어. 이 경험을 감리교회에서는 매우 중요하게 여기지. 존 웨슬리가 복음적 회심을 한 날이기 때문이야. 이렇게 신기한 신앙의 경험을 한 두 형제는 모라비아 형제단이 모여 사는 독일 친첸도르프 공동체인 헤른후터(Herrnhutters)를 방문했지. 그곳에 2주간 머물며 많은 것을 보고 체험하며 배우고 돌아왔어. 중생의 회개에서 경험하는 칭의를 확신하게된 거야. 하지만, 나중에 존 웨슬리는 친첸도르프를 비난하며 관계를 끊게 되지. 존 웨슬리의 생각에는 친첸도르프와 모라비아 형제단은 성화를 강조하지 않음으로 반(反)율법주의자처럼 보였어. 그는 칭의와 성화가 신앙생활의 기본이라고 주장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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