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구본철 화백
삽화= 구본철 화백

아우구스부르크(Augsburg) 평화조약(1555년) 이후 독일 지방 영주가 한 종교를 결정하면 그 지역 주민은 그 종교를 무조건 따라야(cuius regio eius religio)했단다. 종교개혁 당시 독일은 2,000여개의 작은 지방정부로 구성된 나라였어. 독일은 좀처럼 영국과 프랑스 같은 통일된 나라를 경험하지 못했지. 그러던 중 프랑스 나폴레옹을 무찌른 독일 북쪽 베를린(Berlin)을 중심한 프러시아(Prussia)가 독일을 이끄는 강력한 리더로 부상했단다. 1862년 프러시아의 수상이 된 비스마르크(O. von Bismarck, 1815~1898)는 빛나는 외교와 군사 활동으로 1870년 독일을 하나로 통합하는 데 성공하지. 하나의 제국이 탄생했단다.


종교개혁 이후 독일의 루터교회는 몇 세기를 지나며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지. 루터교회는 말씀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영적 일만 하고 나머지 행정적인 일들은 정부가 담당했어. 계몽주의 물결은 루터교회를 휩쓸었단다. 교회 예배 출석률이 뚝 떨어졌어. 사회적 지위와 관습 때문에 교회에 이름을 걸쳐 놓았을 따름이었지. 목사의 설교는 깔끔하고 고상하고 도덕적이었단다. 하지만, 영적 생명력은 찾아볼 수 없었어.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 합리주의적 인본주의는 성경을 사람의 문서나 작품으로 보도록 했어. 독일 신학교는 교회가 운영하지 않고 정부가 책임지고 있었단다. 신학교 교수들은 교회를 위한 신학이 아니라 학문 자체를 위한 신학을 하고 있었어. 신학교의 학문적 수준은 대단했지만 신앙은 없었단다.


신학교는 정부로부터 엄청난 재정적 지원을 받으며 수많은 고대 성경 사본을 비싼 돈에 사들여 성경 원본을 찾아가는 학문을 했어. 이런 학문을 고고학(考古學)과 사본학(寫本學)이라고 해. 성경을 하나의 문서나 문학작품으로 보고 ‘성서 비평학’(본문비평, 문학비평, 자료비평, 전승사비평, 양식비평, 편집비평, 역사비평)을 발전시켰어. 모세오경은 다양한 양식의 문서가 편집된 것으로 보았단다. 학문적 수준이 높아지면 질수록 신앙적 수준도 높아졌을까? 아니, 오히려 반대였어.
이런 신학이 유행할 때 독일을 뒤덮고 있던 사람들의 생각은 어땠을까? 영국에는 베이컨(F. Bacon, 1561~1626)이 이성적 지식에 반해 객관적 경험론(經驗論, Epiricism)을 발전시켰어.


그에 비해 대륙에서는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26)를 중심으로 관념론(觀念論, Idealism)이 발달했지. 관념론은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인간의 이성에 의해 진행된다고 보았단다. 이성을 숭상하는 철학을 ‘계몽주의’(啓蒙主義)라고 하찮아. 이성의 빛으로 세상을 분석하고 경험한다는 것이지. 나중에 독일의 칸트(I. Kant, 1724~1806)는 ‘순수이성’(지성)만으로는 초월적인 존재(神과 宗敎)를 이해할 수 없다고 보았어. 그는 ‘실천이성’(신앙)을 통해 초월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단다. 이 실천이성이란 예를 들면 ‘양심’과 ‘도덕’이야. 칸트는 ‘지식’과 ‘행동’을 통해 신앙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어.


하지만, 슐라이어마허(F. D. E. Schleiermacher, 1768~1834)는 신앙이란 지식과 행동을 넘어서는 ‘감정’(Gefühl)으로 보았단다. 그에게 신앙이란 말씀과 신앙고백이 아니라, 교제와 대화를 통한 직관과 감각, 느낌과 경험이었어.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은 급진적이었고 대담했지. 그를 일컬어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라 부른단다.


헤겔(G. W. F. Hegel, 1770~1831)은 정(正)·반(反)·합(合)의 원리를 가지고 절대정신이라는 역사발전 동인(動因)을 주장했지. 마르크스(K. H. Marx, 1818~1883)는 헤겔과 다윈의 영향을 받아 공산주의 역사관을 정립했어. 자본주의 사회가 부패하면, 혁명이 일어나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나타나고 그 이후에 공산주의 사회(天國)가 온다고 보았지. 역사가 랑케(L. von Ranke, 1795~1886)는 실증주의적이고 과학적 역사 방법론을 주장했어. 헤겔이 역사 발전을 신의 섭리로 본 것을 비판한 것이야. 리츨(A. Ritchl, 1822~1889)은 슐라이어마허의 종교적 경험을 반대하고 도덕적 행동을 주장했단다. 목적체계가 과학적 작업을 일으키고 가치체계가 종교적 영향을 담당한다고 보았어. 기독교는 두 가지 모두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했단다. 하르낙(A. von Harnack, 1851~1930)도 기본적으로 역사 비평학을 수용하고 기독교의 본질은 속죄교리가 아니라, 윤리라고 가르쳤어.


이렇게 독일교회는 신학적으로 정통 종교개혁 신앙에서 멀리 벗어나 혼돈 속에 있었단다. 물론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경건한 신앙생활을 영위하려는 교회와 성도들이 있었어. 그들은 18세기 경건주의 운동의 영향을 이어가는 자들이었고 교회에 생명력을 불어 넣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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