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에게 어떻게 살고 싶은지 질문한다면 나름대로 다양한 답이 나올 거야. 모두 동일한 답을 하지는 않을 거지만 저마다 다른 답의 근거를 생각해보면 ‘행복’일 거야. ‘어떻게 살고 싶은가?’라는 질문은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가?’라는 질문과 동일할지도 몰라.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라. 고대의 한 철학자가 ‘행복한 삶’을 가장 우선순위에 둔 것에서부터 현대에서 말하는 소수인권까지 모두 핵심은 ‘행복’인 것처럼.


다른 것이 있다면 행복을 어떻게 정의하느냐 하는 거지. 시대의 흐름에 따라 행복을 정의하는 것이 바뀌고 있을 뿐 아니라 사람들마다 행복을 정의하는 것도 조금씩 다를 거야. 행복이라는 것이 이념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에서 실제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으로, 공동체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에서 개인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으로 변화되고 있어.


어머니가 볼 때 현대는 지극히 자기중심적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해. 자기행복 추구가 최대의 가치가 되어 있으니 성별도 자기가 결정하고, 결혼도 자녀 출산도 기피하고. 자기행복에 방해가 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인생을 멋지게 사는 것이니 그렇게 사는 것이 옳다고 지지하는 사회! 요즘 너희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욜로, 소확행, 카르페디엠이라는 말도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어.


사람은 행복하게 살아야하고 행복을 위해 사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행복에 대한 바른 관점이 필요해. 행복이라는 것이 자신이 원하는 것은 이루어지고, 원하지 않는 것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 행복이라면 순간적인 만족은 있을지 몰라도 그 누가 진정한 행복을 맛보며 살 수 있겠니? 삶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그래서 어머니는 행복이라는 것도 삶의 모델이신 예수님에게서 찾고 싶어. 인준아, 예수님은 행복하셨을까? 아닐까?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시기로 작정하실 때부터 어떤 삶과 어떤 죽음일지 아셨고, 또 그것을 이루셨잖아. 그 모든 순간이 행복하셨을까 불행하셨을까? 행복을 개인의 만족에 둔다면 불행하셨을 거라고 답할 수 있지만, 행복을 개인의 만족이 아닌 다른 것에 둔다면 행복하셨을 거라고 답할 수 있을 거야.


행복이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소명을 하나님의 방법대로 이루며 사는 과정, 희생적인 삶이 아닐까? 그렇게 사는 과정이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고, 때로는 고통이라고 해석될 수도 있을지 몰라도. 자기만족이 아닌 자기희생이 있는 소명을 이루는 과정!


세상은 자기행복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이고 희생이 그 의미가 퇴색해버려 모두가 자기만족만을 추구하다보니 관계가 깨어지고 그 어디에서도 사랑과 풍성함을 경험하지 못하는 걸 거야. 이러한 현상이 기독교인들에게도 있다면 생각해봐야 하겠지?


인준아, 어머니는 네가 아주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네 중심적인 만족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하나님의 방법대로 이루어가는 삶, 네 만족이 아닌 희생이 있는 삶 말이야. 그래서 순간적인 행복이 아닌 하나님만이 주시는 참 행복을 지금부터 경험해 보았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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