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삽화 구본철 화백
▲ 삽화 구본철 화백


‘복음주의’(Evangelism)라는 단어는 ‘복음’이라고 번역되는 ‘유앙겔리온’(Euangelion)에서 온 말이란다. 복음(福音)은 ‘좋은 소식’으로 본래 고린도전서 15장에 요약되어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고난, 그리고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이 죄인을 구원하는 능력이지. ‘복음주의’는 용어자체에 복음의 내용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처럼 보인단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개혁은 복음주의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지. 개혁가들은 왜곡된 복음을 되찾으려 애썼고 복음을 잘 정리해 보존하고 전했어. 정말 종교 개혁가들은 로마 천주교회로부터 ‘복음주의자’(Evangelici)라고 놀림을 받았단다. 마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Christians)이라고 멸시를 받았던 것처럼 말이야.


하지만, 17세기의 경건주의를 거쳐, 18~19세기에 등장한 ‘복음주의’는 바른 교훈, 곧 복음의 요약인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에 관심이 별로 없었어. 한순간의 회심과 감동적인 체험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믿었지. 18세기 영국과 미국에서 일어난 부흥운동, 즉 제1차 대각성과 제2차 대각성을 거치면서 복음주의는 전통에 대한 반대로 이해되었단다. ‘부흥주의’는 신앙의 전통적 질서를 깨트리고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고 생각했지. ‘부흥주의’가 ‘복음주의’와 동의어로 사용되기 시작했어. 또 19세기 자유주의의 발흥으로 말미암아 그에 저항하는 ‘근본주의’(Fundamentalism)가 ‘복음주의’로 이해되었단다.


‘복음주의’를 정의한다는 것은 쉽지 않아. ‘복음주의’는 교단도 아니고 단체도 아니란다. 그저 여러 교회가 공유하고 있는 어떤 흐름이고 경향이지. ‘복음주의’는 어떤 이데올로기(Ideology)일 수도 있고 운동 혹은 공동체일 수도 있단다. 아니면 복음을 중심으로 한 어떤 정신이나 사상체계 혹은 경향, 흐름 등을 일컫는 것일 수도 있어. ‘복음주의’는 집합개념이고 일종의 분위기에 가까워. 어떤 신학적 체계가 있는 것도 아니야. 각 나라와 교회의 상황에 따라 여러 형태로 발전해온 것이 복음주의란다.


그러면 복음주의의 특징은 무엇일까? 복음주의는 복음 자체보다는 복음을 전하고 받아들이는 개인의 주관적 확신과 경험 혹은 체험이란다. 복음주의는 복음의 내용에 관심이 별로 없어. 오히려 복음의 적용, 곧 개인적 체험과 확신에 관심을 두지. ‘너, 구원 받았어?’ ‘너, 지금 죽더라도 천국에 갈 확신이 있어?’ 그런 의미에서 복음주의는 객관적 복음의 내용을 강조하는 ‘정통주의’(Orthodoxism)보다는 ‘개인주의’(Individualism), 곧 주관적 복음의 적용과 경험에 관심을 둔단다. 이런 복음주의가 강한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침례교회, 성결교회, 오순절교회, 감리교회 같은 부류가 복음주의 교회라고 할 수 있어. 장로교회도 예외는 아니란다. 특별히 20세기에 일어난 수많은 대형 전도 집회는 모두 이런 복음주의 운동이란다. 한국에서는 1973년 빌리 그레이엄이 와서 270만 명을 모았고 1974년에는 ‘엑스플로74 전도 집회’로 모였어. 1980년에는 ‘세계복음화 대성회’로 모여 복음주의가 대세였단다.


복음주의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단다.


첫째, 성경을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는 거야. 기독교를 세계 4대 종교 중의 하나이며 성경을 여러 경전 가운데 하나로 인식하는 세상에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복음주의 신앙은 소중하고 귀하단다. 하지만, 성경 문자주의에 빠지는 위험도 존재해.


둘째,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 체험(연합)을 강조한다는 거야. 하나님의 구원이 지식에 머물지 않고 정적이고 의지적인 영역에 이르러 온 몸으로 체화하는 것은 신앙에 중요한 요소란다. 하지만, 구원이 인간의 주관적 경험에 머물러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적 구원에 대한 강조는 약하지.


셋째, 성도를 전도와 선교 영역에 매진하도록 한다는 거야. 19세기부터 활발해진 개신교 선교는 21세기를 살고 있는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지. 복음이 세상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는 데 큰 역할을 했어. 하지만, 전도와 선교에 전문가인 복음주의는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과 삶에 있어서는 비전문가가 되고 말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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