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삽화: 구본철 화백
▲ 삽화: 구본철 화백

친첸도르프는 할머니가 유산으로 남긴 넓은 땅(Berthelsdorf)에 핍박으로 유랑하던 ‘모라비아 형제단’이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단다. 그 후 수 백 명의 모라비아 형제단이 모여 살게 되면서 그 곳 이름은 나중에 ‘헤른후트’(Herrnhut)라 불려. ‘주님의 보호’란 뜻이지. 지금도 독일 동쪽에 이 이름을 가진 마을이 있고 그곳에 박물관도 있단다. 모라비아 형제단을 ‘헤른후트’(Herrnhutters)라고 부르기도 하지.


처음에는 모라비아 형제단과 친첸도르프의 교회관이 달랐어. 하지만, 나중에 친첸도르프는 모라비아 형제단으로 넘어갔고 그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었단다. 친첸도르프는 독일 경건주의자인 쉬페너에게 보고 배운 것을 모라비아 교회를 섬기는 데 사용했지. 친첸도르프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군대’로 보았단다. 기독교인은 기독교 왕국을 이 땅에 세우기 위해 군인처럼 세계 방방곡곡으로 영적 싸움을 하며 전진해야한다고 가르쳤어. 모라비아 형제단은 최초로 근대적 의미의 개신교 선교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단다. 아프리카, 아시아, 그린란드, 서인도의 인디언에게 선교사를 파송했어. 그들은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했지. 나중엔 캐나다와 티베트까지 선교사를 보냈어. 이들의 선교적 열정에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사람이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J. Wesley, 1703~1791)란다. 그리고 현대 선교의 개척자로 알려진 윌리엄 케리(William Cary, 1761~1834)도 이들의 영향을 받았어.


모라비아 형제단은 1735년 경 처음으로 미국으로 이민을 갔지만 정착에 실패했지. 하지만, 그들이 존 웨슬리에게 준 충격은 기독교 역사를 바꿔 놓는 역할을 했단다. 존 웨슬리가 뉴잉글랜드 조지아(Georgia) 주(州) 선교의 실패로 큰 실의에 빠진 채 배로 잉글랜드로 돌아가고 있었어. 그 때 사나운 폭풍우가 쳐 배가 침몰할 위기에 있었단다. 존 웨슬리는 그 때 모라비아 형제단을 보았어. 그들은 무서운 폭풍우에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지.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평화롭게 행동하는 모라비아 형제단을 본 요한은 큰 충격을 받았단다. 런던에 도착한 후 존 웨슬리가 모라비아 공동체 예배에 참석해 깊은 평안을 경험했지. 이 이야기는 나중에 좀 더 상세하게 들을 수 있을 거야.


모라비아 형제단은 후에 다시 아메리카로 건너갔고 펜실베니아의 베들레헴이라는 지역에 정착했어. 그 후 모라비아 형제단은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어 20세기 초 7만 명의 신도로 성장했단다.


다른 한편 아일랜드에도 모라비아 형제단과 같은 종류의 교회가 생겨났어. 1820년경에 시작된 이 그룹을 ‘플리머스 형제단’(Plymouth Brethren)이라고 불러. 이들은 영국 국교회로부터 떨어져 나왔지. 그들은 오직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둔다고 선언했단다. 무슨 말이냐 하면 교회의 교리와 직분적 권위를 모두 거부한다는 뜻이야. 플리머스 형제단은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시고 직분자를 사용하신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어. 그들은 모든 기독교 교파가 즐겨 사용하는 ‘교회’라는 말을 싫어했단다. 현실 교회가 성경과 너무 멀어진 것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어.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직접 교회를 세우셨다는 것을 부정한 셈이야. 그들은 대신 ‘회중’(assemblies)이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했어. 이 그룹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존 넬슨 다비(John Nelsen Darby, 1800~1882)란다. 후대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따서 ‘다바이츠’(Darbyites)라 부르기도 해. 그들은 스스로 ‘형제’(the Brethren)라 부르고 불리기를 원한단다.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마 23:8)의 말씀을 실천하려고 했어. 이들은 모든 성도가 제사장이기 때문에 안수 받고 생활비를 받는 목사를 거부했단다. 성경을 유일한 기준으로 삼기 위해 어떤 교리나 신앙고백도 거부해. 그리고 예배 형식을 없앴어. 성경에 나오는 대로 그냥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것을 좋아했고 교회 이름도 만들지 않고 그냥 ‘형제’라고 부르면 만족했단다. 그들이 모이는 장소를 ‘교회당’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냥 ‘회의 방’(Meeting Room) 혹은 ‘복음 홀’(Gospel Hall)이라고 불렀어. 이 그룹은 스위스와 프랑스, 독일 그리고 캐나다와 미국에도 영향을 주었단다.


이들의 교회관은 종교개혁으로부터 많이 빗나갔어. 교회의 제도와 직분을 거부하니 말이야!


저작권자 © 고신뉴스 KNC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