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삽화: 구본철 화백
▲ 삽화: 구본철 화백

지금의 체코 지역을 옛날에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지방이라고 불렀단다. 그곳에 종교개혁의 후손들이 살고 있었어. 일찍이 1415년, 한 세기 앞서간 종교개혁가 존 후스(John Hus, 1360~1415)의 순교 후 그의 신앙을 따르는 자들이 있었단다. 그들은 종교개혁 신앙을 지키려고 하다가 무서운 핍박도 받았지. 핍박을 피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유랑하던 사람들이 살아남았는데 주로 인적이 드문 숲속 깊숙이 숨어 살았어. 그들을 ‘형제단’(Unitas Fratrum)이라 부른단다. 이들은 서로 ‘형제’라고 불렀기 때문에 ‘보헤미아 형제단’이라고 불러. 루터가 살아 있던 시기에는 이들의 교회가 200개나 되었고 성도가 20만 명이나 되었지만, 반종교개혁과 30년 전쟁을 거치면서 거의 사라지고 말았단다. 보헤미아 형제단의 최후 감독을 지내고 근대교육의 아버지라 불리는 코메니우스(John Amos Comenius, 1591~1670)는 지금까지도 교육학에서 신앙과 학문의 통일성을 강조한 최초의 인물로 지금까지도 존경받고 있지. 코메니우스는 핍박으로 고향을 떠나 잉글랜드로 도망가 망명생활을 하다가 네덜란드에서 마지막 생애를 보내고 죽었어. 그의 소망은 언젠가 보헤미아 형제단의 신앙이 열매를 맺는 것이었단다.


한편 종교개혁 시기 오스트리아 지방에 야콥 후터(Jacob Hutter, 1500~1536)가 살고 있었어. 후터는 종교개혁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핍박과 박해를 받아 북쪽 지방, 그러니까 지금의 폴란드 지역인 ‘모라비아’로 도망쳤지. 그는 평화주의자였단다. 그곳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어.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재산을 유무상통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고 싶었지. 일종의 초기 기독교 공산주의를 실천했어. 그 공동체에 들어와 함께 살려면 자신의 재산을 포기하고 가난한 자에게 주거나 공동체에 헌납해야 했단다. 참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자기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지. 모든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했어. 자기 것이란 아무 것도 없었단다. 그러니, 더 가지려고 욕심을 낼 필요도 없었지. 사유재산은 사랑의 가장 큰 적이라고 보았단다. 이 공동체는 남자나 혹은 여자만 있는 수도원과는 달랐지. 이 공동체의 특징은 가족이 기초 공동체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란다. 1층은 작업실, 부엌, 빨래하는 곳이고 2층은 가족을 위한 공간이었어. 이 공동체는 1564~1619년 사이에 번창했지. 그들은 물건을 만들어 마을에 판매해 수익을 얻었어. 주변 사람들은 그들이 만든 물건을 좋아했단다. 그러나 이 공동체는 17세기 초 유럽을 휩쓴 30년 전쟁으로 큰 시련을 겪지. 전쟁 중에는 평소에 눈에 가시 같은 존재를 없애버리기가 쉬웠단다. 소수였고 평화주의자였던 그들은 저항할 힘도 없었어. 로마교 신자들의 박해를 피해 그들이 살던 정든 땅을 버리고 떠나야했단다. 추운 러시아 지방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살기도 했지. 그들은 그 후 유랑생활을 하며 신앙을 지키려했어. 18세기에는 미국과 캐나다로 이민을 가 살았단다. 그들의 수가 얼마 되지 않지만 단순한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힘썼어. 이들이 이룬 공동체를 ‘브뤼더호프’(Brüderhof)라고 불러. 지금도 미국과 영국, 독일, 파라과이 그리고 호주와 캐나다에 작은 공동체가 있단다.


핍박을 피해 살아남은 소수의 모라비아 형제단이 1722년 크리스티안 다비트(Christian David, 1692~1751)의 인도로 피난처를 찾고 있었는데, 독일 드레쉬던(Dresden)에 있는 친첸도르프 백작의 사유지인 숲 속에서 살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어. 친첸도르프(Nicholas L. von Zinzendorf, 1700~1760)는 오스트리아 귀족 출신으로 독일 드레쉬던(Dresden)에서 출생했지. 그의 아버지는 고등법원 판사로 경건주의 운동가였던 쉬페너(Spener)의 친한 친구였단다. 쉬페너는 친첸도르프 아버지의 멘토였지. 친첸도르프는 자연스레 아버지의 소개로 경건주의의 요람인 할레대학에서 공부했어. 그곳에서 대학 동아리를 만들어 경건훈련과 선교에 열심이었지. 그는 젊은 시절 유럽을 여행하던 중 뒤셀도르프에서 피티라는 화가가 그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그림을 샀는데 그 그림에 적힌 “이렇게 나는 너를 위해 고난을 당했는데, 너는 날 위해 무엇을 했느냐?”라는 말을 평생 삶의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해. 그의 지지자들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너무 신성하게 여겨 예수님의 그림 앞에 무릎을 꿇고 참배하거나 기도하는 의식을 통해 신비한 대속과 속죄의 은혜를 받으려고 하기도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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