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삽화: 구본철 화백
▲ 삽화: 구본철 화백

뉴잉글랜드 장로교회는 17세기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이민 온 사람들에 의해 세워졌단다. 종교적 박해를 피해 이민 온 사람들이었단다. 대부분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로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사람들이었지. 첫 노회는 1706년에야 세워졌지. 이름이 필라델피아 노회였단다. 7명의 목사로 시작했는데, 스코트-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남 아일랜드,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이 합해서 만든 노회였지.


그 후 1716년에 첫 총회가 구성되었는데 모두 4개의 노회가 있었어. 교회는 40개, 17명의 목사, 3천 명의 교인으로 성장했단다. 유럽에서 많은 이민자들이 몰려오면서 교회가 늘어난 거야. 대체로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출신 계통의 목사들이 수가 많았고 주도했단다. 18세기 이민자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뉴잉글랜드 장로교회는 가장 큰 교파로 성장했어.


초기 장로교회에는 두 경향이 있었단다. 하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중요하게 여기는 쪽으로 ‘뉴 라이트’(New Light)인데 18세기 중반기에는 ‘뉴 사이드’(New Side)를 통해 19세기에는 ‘뉴 스쿨’(New School)로 이어지지. 다른 쪽은 신앙고백을 유연하게 생각했지. 후자는 뉴잉글랜드에 먼저 정착한 비교적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어. 이들은 ‘올드 라이트’(Old Light)인데 ‘올드 사이드’(Old Side)를 거쳐, 19세기 ‘올드 스쿨’(Old School)로 이어져. 교회법과 신앙고백보다는 성경에 근거한 개인의 신앙양심에 방점을 두겠다는 생각을 가졌단다. 서로 많이 토론했지만 하나가 되는 것은 쉽지 않았어.


마침내 1729년 타협안이 만들어졌단다. 그것이 ‘1729년 채택법’(The Adopting Act of 1729)이었지. 디킨슨(J. Dickinson, 1688~1747) 목사가 초안했는데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는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들이 있다는 타협안이었어. 장로교 분열의 봉합은 길버트 테넌트가 자신의 비판이 너무 과했다고 회개하며 교회의 평화를 모색하면서 가능하게 되었지. 하지만, 미봉책에 불과했단다. 결국 나중에 다시 두 교회로 쪼개진단다.


한 세기가 지난 후 교회는 다시 연합하게 되는데, 결정적인 계기는 1756~1763년까지 진행된 프랑스와 인디언의 연합군이 영국과 벌인 전쟁 때문이었단다. 전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교회가 대치할 수는 없었지.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이 교회를 합동으로 이끌었어. 1758년 두 교회가 모여 ‘합동계획’(The Plan of Union)에 서명했단다. 자신들의 입장을 고집하던 두 쪽은 네 가지를 약속했지. 첫째, 부흥을 하나님의 역사로 인정한다. 둘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받아들이지만 융통성을 가진다. 셋째, 목사 안수는 총회가 아니라 노회에서 담당하며 중생과 참된 경건을 평가해야 한다. 넷째, 신앙고백서에 서명하는 것이 중요하고 비정규 신학교육을 받아들이지 않겠다. 대략 200개의 교회와 100명의 목사, 그리고 1만 명의 성도로 성장했어. 100명의 목사는 ‘뉴 라이트’가 주류(73명)였고 ‘올드 라이트’는 27명밖에 되지 않았단다.


그 후 장로교회는 회중교회, 침례교회와 함께 75%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잉글랜드의 국교회의 간섭을 싫어했어. 그들은 교회의 자유를 위하여 미국 독립전쟁에 가장 적극적이었어. 뉴잉글랜드의 잉글랜드로부터 독립한 후 미국(美國) 장로교 첫 총회를 개최하게 되었단다. 첫 총회 당시 1789년에 4개 노회에 177명의 목사와 111명의 목사 후보생과 419개의 교회가 있었지. 교단의 정식 이름은 미합중국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PCUSA)란다.


장로교회와 회중교회가 신앙고백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고 교회 정치에 있어서 분명한 구별이 있었지만, 기구적으로 합치는 것이 쉽지 않았어. 하지만 미국 사회의 급변하는 시점(1820년부터 서부 개척과 산업혁명이 시작됨)에 교회의 성장과 변화에서 전도와 선교를 위한 명분과 실리 때문에 합동한 셈이야(79년 동안). 또 1792년부터 시작된 제2차 대각성(1835년까지)도 교회 통합의 중요한 요인이기도 했지. 그런데 교회의 정체성, 정치, 교리에 대한 차이로 결국 1837년에 가서 다시 분리된단다.


저작권자 © 고신뉴스 KNC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