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자인 루터와 칼빈은 성도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기도, 묵상, 시련’이라고 말했어. 성도는 기도와 묵상 그리고 시련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답게 변화된다는 뜻일 거야. 기도에 대해서는 올해를 시작하며 너에게 해 주었던 이야기와 함께 예전에 몇 번에 걸쳐 말해주었는데 기억나는지 모르겠다. 기도해야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하기 때문이고,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어야 하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것이라고 했었어.


오늘은 묵상에 대해 말해주려고 해. 인준아, 묵상이라고 하면 어떤 상태가 떠올라? 아무도 없는 곳에서 조용히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상태가 떠오르니? 다른 종교에서 강조하는 명상처럼 조용히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것, 혹은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 또는 이런 저런 생각을 다 비우는 것을 말하는 거라고 생각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도 혼자 조용히 앉아 그 말씀을 마음에 되새기는 것이 전부일까? 묵상은 정적인 상태일까, 동적인 상태일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간단하게 말하면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는 거라고 할 수 있어. 말씀을 읽고 행동으로 옮기려면 먼저 말씀을 바르게 해석해야 해. 시대마다, 각 민족마다, 그리고 각 사람마다 각기 다른 관점이 있는 각 자가 가진 관점으로 말씀을 해석해서는 안 돼.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의도가 왜곡되기 때문에 각자의 관점이 아닌 공적인 관점으로 해석해야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냐고? 하나님의 말씀을 공적인 관점으로 잘 해석하고 정리해놓은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등 교리교육서를 읽고 공부하는 거야.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해, 주기도문에 관해, 그리고 십계명이나 사도신경, 성찬과 세례, 기도 등을 포함해 기독교의 핵심 진리를 공적인 관점으로 잘 설명하고 있어.


공적인 관점으로 알게 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인데,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정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인 것이야. 어떤 사람들은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동적인 것을 넘어서 역동적인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어.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히브리서 4:12)하기 때문이야.


어떤 학자는 ‘묵상’의 원어의 뜻을 사자가 자신이 쟁취한 먹잇감을 이리저리 뜯고 맛보며 즐기는 것에 비유했어. 먹잇감을 앞에 두고 으르렁거리며 그것을 즐기며 먹고 완전히 소화시키는 것으로 말이야.


인준아, 말씀을 읽고 깨닫게 된다면 그것이 너를 동요시켜서 도저히 그대로는 있을 수 없게 만들어. 때로는 울부짖으며 회개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게 되고, 또 네 마음의 생각과 뜻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채우기 위해 움직일 수밖에 없는 거야. 그래서 네가 서 있는 전통에서 말하는 묵상은 타종교에서 말하는 명상, 자신의 마음을 자신이 다스리기 위하는 것이나, 아무도 없는 곳에서 조용히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거야. 행동하게 되는 거지.


하나님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 있는 사람(시편 1편)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을 완전히 변화시키기 때문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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