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삽화: 구본철 화백
▲ 삽화: 구본철 화백

1820년대부터는 찰스 피니(Charles G. Finney, 1792~1875)가 등장해 제2차 대각성의 물결을 일으켰단다. 피니는 본래 장로교회에서 회심하고 담임목사로부터 2년 동안 신학교육을 받고 1824년 목사가 되어 복음 전도자가 되었어. 그는 사실 정통신학을 배우지 못했단다.


피니는 원죄 교리를 부정했어. 죄는 아담의 원죄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고 했단다. 태어난 아기는 아직 죄인이 아니라는 거지. 아기가 자라면서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도 있다고 가르쳤어. 종교 개혁가들이 발견하여 후대에 물려준 정통 개혁신앙과 크게 달랐단다. 피니는 부흥 집회 때마다 인간이 스스로 의지력을 발휘해 그 자리에서 즉시 회심하고 그리스도를 향해 결단(Decision)하라고 촉구했어. 에드워즈가 제1차 대각성 때 말씀을 전하고 성령님이 사람 가운데 일하시기를 기다렸다면, 피니는 그 자리에서 바로 인간 스스로 결단할 것을 요구했단다. 인간이 결심하는 순간 비로소 하나님이 은혜를 준다고 설교했지.


차이를 분별할 수 있겠니? 성령님이 인간 속에 믿음을 선물로 주시면 회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의지적으로 결단하고 믿어야만 회심하는 은혜를 받게 된다고 가르쳤단다. 인간이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는 거지. 벤저민 프랭클린이 자신의 책에 인용하고 이솝 이야기에도 등장하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Heaven helps those who help themselves)는 말과 비슷하지 않니?


피니는 ‘구원’을 인간의 의지적 결단으로 획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성화’도 스스로 만들 수 있다고 자신만만했단다. 그는 존 웨슬리의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관한 평해’(Plain Account of Christian Perfection)라는 책을 읽었어. ‘성화’와 ‘성결’과 ‘완전주의’에 대한 확신을 얻었지. 그 결과 피니의 부흥은 ‘노예제도 폐지’와 ‘금주’와 ‘인종차별 반대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단다. 이런 성화의 삶에 대한 강조와 결과는 잉글랜드의 감리교 창시자 웨슬리의 미국적 변형이라고도 할 수 있지. 이런 성화에 대한 강조는 구원의 결과가 아니라, 구원의 확신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했단다.


그의 설교와 사역 방법은 충격적이었지.


첫째, 부흥은 성령님의 주도적인 역사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수단, 즉 ‘새로운 방법’(New Measures)을 사용해야 한다고 가르쳤어. 예를 들면 부흥집회를 알리기 위해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했지. 부흥집회에 여성 도우미들을 동원하고 참석자들 옆에서 결단을 권유하도록 조직적으로 동원했어. 만약 그래도 회심이 일어나지 않으면 부흥회 기간을 밤늦게까지 혹은 며칠 더 연장하는 비법을 적극 사용했지.


‘고뇌의 좌석’(The Anxious Bench)이라는 것을 만들어 설교단 앞에 가까이 두었단다. ‘고뇌의 좌석’으로 나와 기도하면 믿음을 얻는다고 했어. 목사는 예배 기도나 설교 중에 의도적으로 성도 개인의 이름을 언급하면 회심에 더 놀라운 효과를 나타낸다고 믿었단다. 이런 피니의 방법은 부흥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달렸다고 믿는 전통 개혁신앙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지.


둘째, 피니는 장로교회에 머물지 않고 교단을 초월해 일했단다. 나중에는 회중교회에서 일했지. 피니의 부흥은 교단을 초월했단다.


셋째, 피니는 성화를 강조했단다. 특별히 로체스터(Rochester)에서 행한 집회는 수많은 유럽 이주 노동자들에게 절제와 근면과 건전한 노동관을 가지도록 변화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해. 피니의 부흥을 따른 사람들은 노예제도를 적극 폐지할 것을 요구했단다.


넷째, 피니는 인간 스스로 완전한 단계에 이를 수 있다(Perfectionism)고 가르쳤어.


피니는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의 입장을 떠났단다. 원죄, 자유의지, 중생, 회심, 성화에 대한 관점이 신신학적인 방향으로 전환했어. 피니는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신성, 성경의 권위에 관한 교리에는 전통적인 입장을 따랐지만, 인간의 자유의지를 신뢰했고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고 믿었어. 피니의 이런 경향은 당시 미국의 사회변화와 아주 잘 맞아떨어졌단다. 미국의 인본주의와 개인주의, 그리고 서부 개척정신과 아주 어울렸지. 미국 사람들은 피니의 가르침이 매력적이고 설득력이 있다고 여겼어. 피니의 부흥은 19세기 중엽 미국 사회를 관통하는 커다란 물결이었단다. 피니의 영향은 정말 대단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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