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삽화: 구본철 화백
▲ 삽화: 구본철 화백

미국은 서부 개척을 위해 프랑스 나폴레옹으로부터 거대한 미 중부 지역 루이지애나(1803)를 구입했단다. 또 스페인으로부터 플로리다(1819)를 사서 땅을 넓혔단다. 멕시코로부터 텍사스와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를 거의 강탈하다시피 해 사들였지(1840년대). 1848년 이후에는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면서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들이 로키산맥을 넘어 서부로 뻗어갔지. 1867년에는 알래스카를 러시아로부터 사들였어. 이곳에는 엄청난 양의 석유가 매당 되어 있단다. 미국은 어느 순간 거대한 땅을 소유한 부자 나라가 되었지. 그와 더불어 인구도 증가했어. 출산과 이민(1830년 이후)의 증가 때문이었단다. 1800년에 500만이었는데 1860년에는 3,100만으로 증가했어. 동북부 지역에는 산업 발달이 활발하고 동남부 지방은 전통 면화농업과 담배농사가 발달했지. 그러다보니 북부와 남부의 이해관계가 서로 다를 수밖에 없었어.


예를 들면 북부 대표는 미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영국 상품을 수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남부 대표는 반대했단다. 영국이 미국의 조치에 보복하기 위해 면화와 담배를 수입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지. 더구나 영국에서 들어오는 공산품은 값도 싸고 질도 좋은 데 북부에서 만드는 제품을 조잡하고 비싸기만 하다고 불평했어. 그러면 북부 대표는 남부 대표를 애국심도 없다고 비난을 쏟아 부었단다. 더구나 흑인 노예를 혹사시키는 것을 비인간적이라고 놀렸어. 그러나 남부 대표들은 나름대로 이렇게 대답했단다. ‘우리 노예들은 최소한 일자리와 먹을 것 걱정은 평생 안 하오. 그렇지만 북부의 노동자와 실업자들이 정말 불쌍한 자들이오. 그들이 흑인 노예보다 더 비참하다는 건 세상이 다 아는 사실 아니오.’


북부와 남부는 노예문제로 갈등의 골이 깊어졌단다. 본래 노예문제는 각 주(州)가 결정하는 대로 자유롭게 하도록 했지. 노예제도를 인정하는 주와 반대하는 주를 나누어보면 정확하게 남과 북으로 나누어졌단다. 새롭게 생기는 주들도 거의 다를 바 없었지. 1837년까지는 거의 비슷하게 오다가 1846년 이후부터는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주가 훨씬 많아졌어. 1861년에는 노예제도 반대 주가 19개 찬성 주가 15개였단다.


마침내 1861년에 남북전쟁(1861~1865)이 터졌어. 4년간의 긴 전쟁이 시작된 것이지. 7개의 남부 연합이 미연방을 탈퇴한 것 때문에 아브라함 링컨이 공격을 시작했단다. 초기에 남부가 승리하는 것 같아 보였지만, 결국 북부가 승리했지. 북부는 1863년 흑인 노예들에게 자유를 선포했단다. 전쟁에서 죽은 사람인 1백 만 명이 넘었지. 사망한 63만 명의 군인 가운데 2/3는 질병으로 사망했어. 북부 인구의 6%, 남부 인구의 18%가 죽었지. 사실 북부 인구가 남부보다 훨씬 많았고 경제력도 막강했기 때문에 남부가 열세였지만, 전쟁은 생각보다 오래 끌었어. 남북전쟁의 분수령이 된 전투는 그 유명한 게티즈버그(Gettysburg) 전투란다. 3일 동안의 전투에서 1만 5천 명이 죽었던 대 격전이었지. 1863년 링컨은 게티즈버그에서 죽은 병사들을 위로하는 자리에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유명한 연설을 했단다. ‘국민에 의한, 국민의, 국민을 위한 정부는 지구상에서 멸망할 수 없다.’(......Government by de people, of the people, for the people, can not parish on earth.) 1865년 전쟁이 끝나고 남북은 하나가 되고 헌법 13조가 만들어져 노예가 해방되었지. 4백 만 명의 노예가 해방되었어. 그러나 해방된 흑인들이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단다. 먹고 살기 위해 그들은 다시 옛 주인에게로 돌아가야 했지. 그들의 처지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어.


이 때 교회는 어땠을까? 교회도 노예제도 문제 때문에 남과 북으로 전쟁 전에 이미 갈라졌단다. 침례교회는 1845년에 남과 북으로 교회가 갈라졌어. 감리교회는 1846년에 갈라졌지. 장로교회는 제2차 부흥운동에 대한 견해 때문에 1837년에 뉴 스쿨(New School)과 올드 스쿨(Old School)로 나눠졌단다. 그 후 뉴 스쿨은 1857년에 노예제도 때문에 남과 북으로 나눠지게 되었어. 1861년 남북전쟁이 시작되면서 장로교회는 모두 네 개로 나눠졌단다. 북 장로교회 올드 스쿨 총회는 1861년 ‘연방 정부를 지지하고 격려하고 연방 정부에 힘을 다하자’고 결정했지. 찰스 하지(C. Hodge)는 반대했어. 교회는 영적인 영역이 아닌 정치적인 것을 결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단다. 그에 비해 남 장로교회 올드 스쿨 총회는 남부 군대를 지지했어. 남과 북의 교회 서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전쟁에 임했지. 대단한 혼돈의 시기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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