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제도와 교회

▲ 삽화: 구본철 화백
▲ 삽화: 구본철 화백

남북전쟁은 정치적으로 남북통일을 이루기 위해 일어났지만, 더 근본적 원인은 노예제도에 대한 현실과 이상적 차이에 있단다. 남부 농장주 가운데 노예를 인간적으로 대우하는 다수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매매해서 아메리카에 비싼 가격으로 팔며, 열악한 환경에서 중노동을 하도록 한 것은 비난 받아 마땅해. 미국 교회는 전반적으로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노예제도 폐지를 부르짖었단다. 감리교회는 1784년, 1785년, 침례교회는 1789년, 장로교회는 1818년에 각각 노예제도 폐지를 주장했어. 북부 교회나 남부 교회 모두 그렇게 주장했지.


하지만 1830년경부터 남부의 경제적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어. 얼마 전부터 남부의 담배농사의 쇠퇴로 비싼 노예를 유지할 수 없었단다. 그런데 목화씨를 빼는 기계의 발명(1793)과 보급으로 목화를 대량으로 생산하여 많은 돈을 벌어들이기 시작했어.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지. 값싼 노동력은 노예였어.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자유와 평등을 외쳤지만, 남부 미국인은 노예 매매, 구속과 불평등을 정당화하기 시작했단다. 그들은 그리스 로마 시대의 노예제도에 호소하면서 노예제도를 합리화했어. 뿐만 아니라, 남부 여기저기서 흑인 폭동이 일어나고 백인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단다. 그 분위기를 몰아 노예들의 인권과 처지는 더 열악해졌지.


이런 분위기에 교회도 한몫했단다. 교회는 성경에도 노예제도가 허용되고 있으니 노예제도가 허용될 수 있다고 정당화했지. 1845년까지 2만 5천명의 감리교 교인이 노예를 소유했고, 1천 2백 명의 목사도 노예를 집에 데리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남부와 서부 개척지에서 일어난 제2차 영적 대각성도 노예제도에 대한 옳은 시각을 제공해주지 못했지. 부흥주의자들의 숫자가 증가하면 할수록 현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쪽으로 고착화되었어.


그런 점에서 노예제도에 대한 미국 부흥주의자들의 생각과 대처는 몇 가지 한계를 보여주었단다. 첫째, 그리스도인의 소금과 빛의 역할이 복음전도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오류가 있음을 보여주었어. 둘째, 부흥주의 교회의 성장이 강한 윤리적 확신을 강화시킨 점도 있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약화시킨 점도 있다는 점을 보게 되지. 셋째, 부흥주의자들은 스스로 잘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강하게 공격하지만,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에 대해서는 잘 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단다. 즉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잘 보면서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 원리와 비슷한 부분이 있지.


마지막 부분에 대해 좀 더 설명해 볼까? 노예폐지 운동은 노예가 필요 없거나 별로 없는 북부 지역에서 주로 일어났단다. 북부 부흥주의자들은 노예제도에 대해 비판을 쏟아 부었지만, 미국 인디언들의 무자비한 이주 정책과 이민자들이나 종교적 소수자들에 대한 박해와 도시 빈민과 실업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했지. 산업사회였던 북부 지역의 비인간적 경제적 환경을 쉽게 용납한 것이란다.


또 노예폐지 주장자들이 미국의 인디언 영토 강탈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주장하기도 했어. 1769년 아모스 아담스(Amos Adams, 1728~1775) 목사는 노예제도와 관련해 이렇게 말했다고 해. “나는 우리에게 터전을 마련하여주시기 위하여 미개 민족들을 점차로 끊어버리시는 하늘의 섭리를 회고하면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가나안 사람들의 죄가 극에 달하고 그들의 우상 숭배와 사악 때문에 가나안으로 하여금 그들의 거주민들을 토하게 하셨다......” 미국 교회가 직면했던 노예제도 문제는 인간의 죄가 얼마나 깊숙이 그리고 교묘하게 위장해 그리스도인 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단다.


하지만, 잘 구별해야할 것이 있어. 미국 부흥주의 기독교의 약함이 복음 자체의 약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야. 인간은 불완전하지만 복음은 완전하단다. 성도는 다른 사람보다 자기 자신의 죄를 없애는 데 더 적극적이어야 해. 다른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고 비난하는 것은 쉬워. 자신과 가족의 죄에 대해 관대하고 무시하려는 연약함을 볼 수 있어야 해! 노예문제는 미국 교회의 연약함을 보여주는 중요한 부분이란다. 개인적인 회심이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감을 자동적으로 바꾸게 되는 것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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