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요즈음 네 또래들이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것이 힘든 이유 중 하나가 경쟁이 난무하는 사회, 경쟁이 미덕이 된 시대이기 때문이라고 말해주었지? 물론 어른들 사이에서도 자기중심성과 시기 질투 등 때문에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는 것이 힘들기도 해. 특히 지인의 자녀에게 아주 좋은 일이 생기면 겉으로는 축하하지만 속으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거든(다른 사람을 시기 질투를 하는 만큼 자신에게나 자신의 자녀에게 좋은 일이 생긴다면 몰라도 시기 질투한다고 해서 자신에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는데 끊임없이 시기 질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래서 어머니는 경쟁이 옳지 않다고 했는데, 네 생각은 어때? 경쟁은 무조건 나쁘다고 할 게 아니라 ‘선의의 경쟁’은 좋은 것이 아니냐고 물었었지? 그런데 어머니는 ‘선의의 경쟁’이라는 단어 자체가 조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선의’라는 단어와 ‘경쟁’이라는 명사의 조합부터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해.


지금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개념의 경쟁이라면 그 개념에는 선한 것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 왜냐하면 경쟁이 가능하려면 모든 조건이 동일해야 하는데, 모든 조건이 동일한 사람이 있겠니? 너와 모든 조건이 동일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조건이 동일하지 않은 경우에는 경쟁이 불가능해. 그렇기 때문에 다른 두 사람(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이 서로 겨루는 경쟁은 시작부터 잘못된 것이 아닐까? 아무리 선의라고 해도 경쟁은 결국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데, 어떻게 그것이 선할 수 있겠니?


그래서 어머니는 이렇게 생각해. 경쟁이 가진 의미, 그리고 정말로 선의의 경쟁을 하려면 경쟁은 너 아닌 다른 사람과 하는 것이 아니라 ‘너 자신과 해야 하는 거’라고. 성경 속에도 경쟁을 말하는 듯한 부분(달음질 하는 자, 푯대를 향하여,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 등)도 다른 사람과의 경쟁이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에 각자가 해야 할 것을 강조한다고 생각해.


인준아, 네가 지금 속한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경쟁의 개념이 아니라 성경적인 관점에서의 경쟁은 어쩌면 꼭 필요한 것이라 할 수 있어. 네가 너와 하는 경쟁! 네가 오늘 해야 할 일을 우선적으로 하는 것과 너의 게으름과 경쟁해야 하고, 네가 해야 할 분량을 다하지 못했을 때는 자고 싶은 마음과 경쟁하는 거고.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것과 경쟁하고....


예수님이 사람들을 대하신 것을 면밀히 살펴보면 다 개별적으로 대하셨어. 비교하거나 경쟁시키지도 않으시고 같은 방법을 제시하지도 않으셨잖아. 부자청년에게는 재산을 팔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셨고, 죽은 아들 때문에 슬퍼하는 여인에게는 아들을 살려주셨고, 삭개오에게는 그의 집에 머무시는 것만으로 삭개오가 회개하게 하고, 사마리아 여인을 대할 때도, 병든 자를 대할 때도 각각 다르셨잖아. 그리고 베드로가 요한은 어떻게 되겠냐고 여쭈어보았을 때 요한의 일은 신경 쓰지 말고 베드로 자신의 일만 신경 쓰라고 하셨잖아.


인준아, 즐거워하는 친구와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친구와 함께 우는 것이 힘들 때가 많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친구의 기쁨과 슬픔에 진정으로 함께하려면 다른 사람과 경쟁하는 것을 멈추어야해. 너 자신과 경쟁해야지만 ‘선의의 경쟁’이라는 말도 참이 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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