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졸업생이 결혼한다며 청첩장을 들고 어머니를 찾아왔어. 어머니를 기억하고 결혼소식을 알려오는 졸업생들을 만날 때면 이러한 기쁨 또한 경험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일을 주신 하나님께 참 감사해.^^ 아내가 될 사람을 만났을 때부터 결혼 준비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넋두리 겸 웃으면서 질문하는 거야.


“교수님께 여쭈어봐서 될 건지는 모르겠는데 여자는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사랑을 주어도 끝이 없어요. 이걸 맞추어주면 고맙게 생각하다가도 저거를 원하고, 저거를 해주면 그걸 원하고. 자기를 사랑하는지 계속 확인받고 싶어 하고... 왜 그래요?”


예외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여자에게 그런 경향이 있다고 말해주면서 그 이유가 무엇인지 어머니가 알고 있는 것(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을 나누었는데 너에게도 말해주려고.


하와가 하나님께 반역하여 받게 된 벌에 대해 성경에는 총 세 가지로 말씀하고 계셔.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세기 3장 16절)


‘임신의 고통,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아내를 다스리는 것’ 첫 번째는 많이 들어보았으니 알거고, 세 번째 아내를 다스린다는 것은 지배가 아니라 대표성 혹은 권위(권위주의가 아니라)를 의미. 두 번째인 ‘남편을 원하고’는 ‘남편을 사모하고’라고 해석될 수도 있다고 해. 어떤 책에서는 조금 더 극단적인 표현을 했는데, ‘남편에게 사랑을 구걸하며’라고 되어 있어.


여자들이 교제하는 남자에게, 혹은 아내가 남편에게 사랑타령(적당한 표현인지 모르겠다. ㅎ)을 하는 이유는 죄로 인한 벌인 것 같아. 구걸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완벽하게 결핍되어 있을 때 하는 거잖아. 그러한 결핍을 만족시킨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야.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거와 같으니까. 어떻게 끊임없이 아내를 사랑할 수 있겠니? 여자들도 자기 자신을 볼 때 사랑스럽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은데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어떻겠어?


그래서 에베소서에서 남편의 역할을 예수님의 역할로 설명해놓으셨을 거야.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해 무조건 사랑하시고 목숨까지 주신 사랑 말이야. 이런 사랑은 무기력한 사랑이 아니고 생명을 살리는 가장 강력한 사랑이잖아. 별로 사랑스럽지 않은 아내를 끊임없이 사랑할 수 있는 힘은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죽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 사랑이 남편에게 흘러넘칠 때 가능한 거 아닐까?


이러한 남편의 사랑은 아내의 결핍을 채우는 것에서 그치는 게 아닐 거야. 우리는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하기 때문이고,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하기 때문이지. 그래서 남편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예수님의 사랑을 가정에서 실천함으로 인해 가족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간접적으로 나마 경험하게 하는 것과 함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들어야 하지 않을까?


“기독교는 참 이상한 말을 해. 사람들은 죄인이라 죽을 수밖에 없는데 사람을 너무나도 사랑한 예수님이라는 신이 죽음과 부활을 통해 생명을 주셨대. 너무 웃기지 않아? 그런데 저 집의 남편을 보니 그게 무슨 말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아. 어떻게 저렇게까지 아내와 자녀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 완전 자신을 죽이는 사랑을 하는데도 줏대 없는 찌질이가 아니라 아주 든든한 기둥이잖아. 아마 기독교가 말하는 예수님의 사랑이 저런 거일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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