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구본철 화백
▲삽화: 구본철 화백

제1차 대각성에는 좋은 점만 있었을까? 그렇지 않단다. 대각성은 주로 야외 집회를 통해 일어났지.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흥분하고 감정이 고조되고 비명과 웃음과 입신과 환상, 그리고 발작 같은 경험을 했어. 심지어 어떤 목사는 그런 것들을 일부러 조작하기도 했지.


그런 광신적인 경향에 대해 염려하며 걱정하던 교회와 지도자들이 대각성을 주도했던 교회들과 대립하기 시작했단다. 신앙을 감정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지지했던 쪽은 ‘뉴 라이트’(New Lights)라고 불렀고, 신앙을 교리적 기초 위에 세워야한다고 주장하는 쪽을 ‘올드 라이트’(Old Lights)라고 불렀어. ‘뉴 라이트’는 ‘올드 라이트’가 교회질서를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기독교의 중요한 ‘부흥’을 놓치고 있다고 비난했어. 목사이든 회중이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 중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했지. 회심과 중생의 경험이 없는 신자의 교회는 거짓이라고 비난했어. 그런 교회를 떠나야한다고 가르쳤단다. 예를 들면 길버트 테넌트는 1749년 ‘회심하지 않은 목사의 위험성’이라는 설교를 했어. ‘올드 라이트’ 목회자들은 소경을 인도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자들이라고 비난했지.


사실 이런 생각은 대각성이 시작된 이후에 생긴 것만은 아니야. 이미 1720년대에 뉴캐슬 노회 목사 일부는 목사의 교리적 입장과 도덕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신앙고백+대·소요리문답+예배모범+교회정치+권징조례)에 ‘서명’해야 한다고 주장했어. 이 주장에 대한 반대도 만만치 않았단다. 일부 목사들은 신앙양심은 어떤 문서에도 매이지 않고 오직 성경만이 최종적인 권위를 가진다고 하면서 서명을 거부했지. 서명보다는 회심의 경험이 더 중요하다고 했단다. 이 두 주장은 팽팽히 맞섰어.


교회는 급속히 성장하는 데 제대로 훈련 받은 목사가 없었던 것이 문제였어. 빨리 목사를 만들어 교회에서 일하도록 해야 했는데, 중생한 경험만 있으면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부분에서 모자라도 목사로 임직했던 거란다. ‘올드 라이트’ 입장에서는 복음전도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지만, 집회 인도자들이 교회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기존 교회 성도들을 빼앗아가는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지. 또 ‘뉴 라이트’ 교회는 정식 교육을 받지 않은 무자격 목사를 무분별하게 양산시켜 영적 혼란을 야기 시킨다고 비난했어. 하지만, 길버트 테넌트 목사가 소속된 당회는 이런 주장과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했지.


결국 1741년 장로교회는 두 쪽으로 나눠졌어. ‘뉴 라이트’는 ‘뉴 사이드’(New Side)로, ‘올드 라이트’는 ‘올드 사이드’(Old Side)로 나눠졌단다. ‘뉴 사이드’ 시찰이 한 개였다가 1745년에 또 다른 시찰이 연합해 두 개의 시찰이 되었지. 이 분리는 신학교육을 위한 신학교 설립에도 영향을 미쳤어. 뉴 사이드에서는 1747년 ‘뉴 저지 대학’(College of New Jersey)을 세웠는데, 후에 ‘프린스턴 대학’(Princeton College)으로 발전하고, 올드 사이드에서는 ‘프란시스 엘리슨 아카데미’(Fransis Alison’s Academy)를 세웠는데, 나중에 ‘필라델피아 대학’(College of Philadelphia)이 된단다.


프린스턴 대학은 장로교 목사를 잡아먹는 학교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이상한 일이 자주 있었어. 이 학교 학장을 맡기만 하면 1~2년 안에 죽었기 때문이지. 1747년 조나단 디킨슨이 첫 학장이 되고 개교한 후 바로 죽었어. 다음으로 1758년 아론 버(Aaron Burr, 1716~1757) 목사가 엄청난 재정을 기부하면서 학장이 되어 학교를 프린스턴(Princeton)으로 이전한 후 1년 만에 죽었어. 그 후 바로 유명한 설교자이며 신학자인 조나단 에드워즈가 학장을 맡고 난 후 6주가 못되어 죽고 말았단다.


스코틀랜드에서 초빙된 위더스푼(John Witherspoon, 1722~1794)이 학장을 맡으면서 드디어 안정을 되찾고, 1758년 ‘올드 사이드’와 ‘뉴 사이드’가 서로 다시 합하게 되면서 정식 장로교회 신학교육 기관으로 인정되었단다. 위더스푼은 프린스턴 대학을 성장시키고 나중에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유일한 목사였어. 위더스푼은 국가 정치에 적극 참여하며 뉴잉글랜드의 사회 건설에도 관심을 가졌단다. 실제로 그는 목사 양성에는 크게 기여하지 못했어. 예를 들면 위더스푼이 있던 1776년부터 1783년까지 단지 17명만 목사만 배출했지. 그것은 전체 졸업자의 21%밖에 되지 않았단다. 그것 때문에 새로운 교단 신학교가 세워지게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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