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2:1-24 '준비되리라'

오늘의 본문은 교회에 오래 다니신 분들이라면 너무도 많이 들어보신 말씀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족장 아브라함에게 백세에 얻은 기적 같은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는 시험 앞에 순종함으로 놀라운 축복을 받는 내용의 본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순종의 결말로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지명하게 됩니다.
우리는 여호와 이레를 하나님께서 준비하신다는 뜻으로 알고 있습니다.

많이 들어온 말씀이지만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 깊고 폭이 넓어 엄청나게 깊은 해석이 가능하고 그 속에 끝없는 하나님의 지혜가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똑같은 본문으로 수많은 목회자나 강사가 설교를 할지라도 각각 새로운 관점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풀 수 있으며 은혜의 시간을 누릴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설교의 중심과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이 되어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로 말씀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 즐거움을 누리는 성도라면 어떠한 설교자가 설교를 할지라도 은혜로운 시간이 됩니다. 그러니 예배에서 성공을 하려고 하면 더 좋은 말씀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더 좋은 강사, 더 좋은 설교자, 더 좋은 성경공부들, 더 재미있는 강의들” 이런 것들이 예배의 성공을 위한 해결책이 아닙니다.

알고 보면 이런 것들은 아주 위험합니다. 이미 한국 사회에 많은 이단들이 혈기왕성합니다. 의식 없이 성경공부를 하러다니면 이러한 이단들에게 너무나 쉬운 먹잇감이 되고 맙니다. 개인의 취향에 맞게 강의나 성경공부를 찾아다니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동입니다.

성경은 불변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말씀은 변함이 없습니다. 개인의 취향에 맞게 말씀을 바꾸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배에서 성공을 하려고 하면 말씀을 바꿀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바꿔야 합니다.

어떤 말씀은 듣기 좋고 재미있고 신나고 위로가 되는데 다른 말씀은 지루하고 시작하자 말자 귀가 닫히고 눈이 감기십니까? 말씀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편식하는 겁니다. 집에서 어머니가 해주는 밥은 때때로 편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편식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아시고 우리가 꼭 필요한 것들로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번 코로나 사태가 터지고 나서 참 여러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코로나를 어떠한 관점에서 봐야 할지,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지, 참으로 많은 고민이 되었습니다. 바이러스가 어떠한 대상 때문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려고 이렇게 퍼졌다고 단정 짓기에는 너무나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안타깝게도 이 바이러스로부터 모두가 어려움을 겪고 있고 또한 지금 바이러스에 걸린 사람에게 “네가 심판 받아야 하기 때문에 걸렸다고”하는 것은 너무나 가혹하며 사랑이 없는 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천지를 심판하시려고 이 바이러스를 퍼뜨렸다고 한다면 신천지 외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바이러스로 인한 어려움에 놓여 있는데 그들의 정의는 어디에 있습니까? 너무나 많은 개인과 가정과 친척과 동료들이 어려워합니다. 사회와 경제가 많이 힘들며 사람들의 생업이 위기에 처했습니다. 대한민국 나라 전체의 타격이 너무나 크고 많은 나라들로부터 차별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사람의 정의는 어디에서 찾는다 말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코로나가 어떤 사람들의 심판이라고 명확하게 단정 짓기보다는 코로나가 이 시대와 사람들 모두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무서운 경고와 메시지로 받아 드려야 합니다.

바이러스가 심판이 아니라는 뜻이 아닙니다. 단지 이것을 인간의 편견과 차별과 정죄함의 도구로 사용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사람이 나서서 서로를 정죄하면 안 됩니다. 신천지의 이단 교리와 거짓 가르침을 미워해야 하는 것이지 사람을 미워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그들도 참된 복음을 듣고 성령의 이끌림에 참된 믿음으로 들어오도록 바라고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원수도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죄를 미워해야 되지 사람을 미워하면 안 됩니다.

집단사상과 집단차별은 아주 무섭습니다. 바이러스 보다 더 무섭고 더러운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자가 집단 차별에 동참하면 안 됩니다. 이미 뉴스를 통해서 전 세계에 많은 한국 사람들이 집단차별의 피해자가 되고 있습니다. 단순히 한국 사람이라고 차별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보면서 바이러스 덩어리로 보는 것이지요. 사람의 개인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가 소속된 집단을 보며 차별화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코로나바이러스가 더럽고 역겹습니까?
아니면 이런 집단차별의 사상이 더 더럽고 역겹습니까?

우리도 조심해야 합니다. 지금은 한국인들이 타겟 되니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지만 우리도 이러한 잘못을 자주 범합니다. 사람을 개인으로 보지 않고 집단 소속에 의해 그 사람을 모르면서도 정죄해 버리는 것입니다. 한국사회는 다른 나라들과 달리 여러 인종들이 섞여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다른 나라들과 같이 백인 흑인 황인 등, 피부색으로 구분이 된다고 하면 얼마나 심한 인종차별이 되겠습니까? 인종도 같으면서 지방차별도 살벌한 한국입니다.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지역차별과 편견이 있지 않습니까? 차별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는 청결법이 있습니다. 부정한 것들과 청결한 것들에 대해 구약의 율법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부정한 동물을 먹어도 안 되고 피를 흘려도 안 되고 죽은 시체를 만져서도 안 되고 질병에 걸려도 안 됩니다. 부정한 자들은 격리되어 여러 가지 절차를 따라 청결해져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거룩하고 구별된 백성으로 세우셨기 때문에 지켜야 하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꼭 알아야 하는 것은 구약의 부정한 것들은 궁극적으로 죄의 더러움을 표현하며 죄로부터 격리하며 백성들이 거룩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구약에는 그러한 부정한 것들이 죄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죄를 멀리하는 차원에서 부정한 것들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제일 많이 하신 일이 병든 자들을 고치시는 일이였습니다. 앉은뱅이가 걷게 되고, 맹인이 보게 되고, 귀머거리가 듣게 되며, 문둥병자가 깨끗함을 입고, 피를 흘리는 자는 피 흘림이 멈추고, 죽은 자가 살아났습니다. 그 모든 치유함의 목적은 예수님 자신이 친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러니 치유의 모든 핵심은 구원입니다. 부정한 질병이 나쁜 것이 아니라, 그 병들이 의미하는 죄가 문제이고,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고치시면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표현방식이 변합니다. 하나님은 불변하신 하나님인데 어떻게 바뀌다니요? 하나님이 바뀐다는 말이 아니라 죄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니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표현방식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더럽고 부정한 죄의 문제가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하게 되니 이제는 옛날의 청결법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무섭고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었는데 신약시대에 들어와서는 자비와 용서의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단순히 용서하고 덮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용서할 수 있는 근거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자가가 있어 우리의 죄가 용서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러니 같은 하나님이신데 신양성경에 와서는 자비롭고 용서하며 부드러운 아버지로 표현이 된다는 것입니다. 탕자비유에 등장하는 두 아들과 아버지의 모습을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옛날의 진노하시는 무서운 하나님이라면 탕자비유의 아들들을 가만히 용서하고 받아 드리겠습니까? 돌로 쳐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옛날의 진노하시는 무서운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에 용서가 가능합니다.

그러니 코로나바이러스는 부정하거나 구약에서 말하고자 하는 더러운 질병이 아닙니다. 어떤 학자들은 구약의 청결법을 사용해 이런 질병으로부터 성도들을 격리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예배를 안 드리는 것이 더 성경적이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예배를 안 드리는 것이 더 성경적이라고 결론을 내립니까? 코로나 걸리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그 어떠한 이유이든 교회가 참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것이 심판입니다.

우리는 구약의 청결법을 완수한 자들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여러 가지 청결법으로 깨끗해지려고 노력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완전한 청결법을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이라는 청결법을 통과했습니다. 이것은 완전한 청결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죄의 문제로 부정함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유롭게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나아올 수 있습니다. 격리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직도 구약의 청결법을 주장하며 부정하다고 격리해야 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부정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오늘 세상은 코로나라는 산을 넘어가야 합니다. 다 함께 이 바이러스사태를 이겨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모리아 땅에 있는 한 산에 올라가 아들 이삭을 바쳐라 하시는데 그 하나님의 말씀이 아브라함에게는 어떻게 들렸겠습니까? 이 무서운 하나님의 명령이 축복으로 들렸겠습니까? 아니면 심판과 저주로 들렸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코로나가 여러분들에게 축복으로 들립니까? 아니면 심판과 저주로 들립니까?

아브라함에게 얼마나 큰 심판으로 들렸겠습니까? 아들을 바치라는 명령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라면 수많은 말을 할 수 있고 수많은 이의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아들을 바치라니요? 무엇인지 몰라도 하나님 이것은 아닙니다. 탕자 비유 속의 큰아들처럼 ''제가 하나님을 얼마나 잘 섬겼습니까?” 우리는 너무나 할 말이 많을 것입니다.

수 만 가지 이의와 질문을 할 수 있던 상황에서 아브라함은 일절 대꾸 없이 말씀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 모리아 땅으로 출발했습니다. 코로나사태 앞에서 우리는 너무나 할 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정부는 정부대로 국민들은 국민들대로 교회는 교회대로 시끄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따르는데 너무나 할 말이 많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명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함께 모여 한 공동체를 이루어 하나님께 예배드리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힘써 지키라고 명령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로마서 8:35-39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 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아브라함처럼 묵묵하게 순종의 발걸음을 떼야 합니다. 아무리 코로나가 심해도 교회가야 하며 예배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마음자세로 예배에 참여해야 합니까? 아브라함처럼 아들을 바치는 각오를 가지고 참여해야 합니다. 내 자신을 바치는 각오를 가지고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가 예배 드려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바치는 각오를 가지고 순종하며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며 예배 드렸습니다. 교회는 자녀를 바치는 각오로 예배를 계속 드려야 합니다.

집에서 영상으로 보는 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그것은 예배에 대한 인식이 너무나 짧은 사람이 하는 주장입니다. 예배는 감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찬양을 따라하고 말씀을 듣는 행위가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으며 교회로 각 지체들이 한 몸을 이루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보며 하나님과 교제를 하는 시간입니다. 예배가 단순한 감상문화라면 다 집에 가서 인터넷을 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거룩함에 접촉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끝까지 하나님을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이삭을 구원해 주십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 둘이서 하나님을 경배하며 예배드리고, 아브라함은 다음과 같은 행동을 취합니다.

창세기 22: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여러분 아브라함이 무엇을 보고 이 말을 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아들을 바쳐야 했습니다. 그의 눈앞에 무엇이 보였겠습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의 자녀를 바쳐야 한다면 눈앞에 무엇이 보이겠습니까? 도대체 아브라함은 무엇을 보았길 래 아무 말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었고 끝에는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불렀겠습니까?

여호와 이레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다라는 뜻으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레'는 “라아”라는 히브리단어에서 유래가 되는데 이 단어의 뜻은 '보다' 혹은 '보인다'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 이레라는 말을 했는데 그 뜻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다'라는 뜻도 있는 반면에 '하나님이 보여 주신다' 혹은 '하나님을 본다'라는 뜻도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본다”라는 말은 성경 속에 참으로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본다고 하니 우리교회가 오랜 시간 동안 함께 상고해온 욥 설교가 떠오릅니다. 욥이 회개하며 ''이제 하나님을 눈으로 뵈옵는다''는 말을 했습니다. 또한 에스더에서는 아하수에로 왕이 하나님을 상징하게 되는데 왕의 기색을 살피는 내시들이 있습니다. 단순하게 하나님의 감정이 어떠할까 하나님 기분이 좋을까 안 좋을까 그것을 살피고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어떻게 영이신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말입니까? 히브리서에서 그 답을 우리에게 줍니다. (히11:1)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이 모리아 땅에 있는 산 위에서 아들을 바쳐야하는 마음으로 올라갔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살려주신 후에 그는 믿음으로 무엇인가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여호와 이레라고 그 땅을 지명합니다. 성경자료들을 여러 가지로 많이 찾아보아도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치는 사건에 대해서 거의 만장일치로 통일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사건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상에서 죽이시는 사건으로 명확하게 연결이 됩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섬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바쳐도 하나님이 능히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시험에 순종함으로 그가 본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았고 그의 십자가와 부활을 바라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 메시아를 바라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땅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지명합니다. 자신의 아들 이삭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신다고 말하며 세상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위대한 '여호와 이레'라는 예언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코로나라는 큰 시험거리가 앞에 있습니다. 이 산을 넘어가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모이는 것도 두려움 가운데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기 이 시기를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합니까?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이 산을 올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자신을 산 제물로 바치는 마음으로 예배에 참여해야 이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창세기 22장 끝부분에는 갑작스럽게 나홀의 족보가 등장합니다. 뜬금없이 등장하는 족보입니다. 어떻게 보면 왜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이 위대한 장에 나홀의 족보를 더하고 있는지 참으로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홀의 족보에 아주 익숙한 이름이 하나 등장합니다. 그 이름은 리브가 입니다. 리브가는 장차 이삭의 아내가 될 사람입니다. 본래 족보에서는 여자나 딸의 이름을 기록하는 일이 매우 드둚니다. 나홀의 족보에는 모두가 다 남자들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리브가 홀로 여자가 등장합니다. 그러니 나홀의 족보는 리브가를 등장시키는 목적으로 적혀있습니다. 창세기 22장 초반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합니다. 그런데 후반부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삭의 아내 될 여인을 준비하고 계신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순종을 한 아브라함과 이삭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모리아에 있는 산을 넘어 리브가를 준비하신다는 내용입니다. 산 이편에서는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하시면서 산 건너편에서는 나홀의 족보를 통해 리브가를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코로나라는 시험의 산을 바른 예배로 지켜내고 순종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위해 산 건너편에 리브가와 같은 위대한 축복을 이미 준비하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니 가혹한 순종을 요구하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상상도 못하는 아름다운 믿음의 여인 아름다운 축복을 이미 준비하신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위해 리브가를 준비하셨습니다. 나중에 리브가를 데리고 아브라함의 집으로 데리고 오는 장명을 읽어보더라도 리브가는 준비된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도 볼 수 있습니다. 리브가만 이삭을 위해 준비된 여자가 아니라, 이삭 또한 리브가를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믿음의 사람으로 단련시키고 준비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에 이삭은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인물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리브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나타냅니다. 오늘 우리가 바로 교회이고 리브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리브가를 위해 이삭을 준비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준비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열 처녀 비유에서 한 가지 생각하지 않고 지나가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만 보면서 잘 준비하고 기다리라는 교훈으로 받아드립니다. 하지만 이 비유에서 신부만 준비하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신랑 또한 준비하시고 애타게 기다리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얼마나 준비하시고 기다리신지 모릅니다. 창세전부터 하나님께서는 준비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 창조장에도 둘째 날에 물을 나누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창조되기도 전부터 우리를 만나시려고 계획하며 준비하며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동일하게 말씀으로 우리와 만나시려고 준비하십니다. 우리가 주일날 제일 멋지고 예쁘게 꾸미고 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러 가는 것 보다 더 신경 쓰며 애타는 마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이 얼마나 준비하고 기다리시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아무리 대단한 준비를 해도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만나시려고 준비하신 노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거대한 우주에 날아가는 먼지만도 못합니다. 하나님은 세상 역사를 주관하사 몇 천 년을 거슬러 성경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준비하고 이 말씀으로 오늘 나를 만나고 계십니다. 그런데 오늘 한국 교회는 너무나 쉽게 하나님을 만나는 이 예배를 우리의 필요와 우리의 편의에 맞추며 너무 쉽게 생각합니다. 주일성수를 자신의 기분대로 지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부산개금교회는 어떠한 환난이나 핍박이나 죽음이 닥칠지라도 예배를 지키며 하나님을 만나는 교회가 되시길 소원합니다. 서로에게 손가락질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를 자신의 편견과 정죄하는 도구로 사용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심판 앞에 자신을 낮추며 회개하는 성도여러분들이 되시길 소원합니다.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코로나만 아니라 어떠한 시련이 닥쳐도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배의 승리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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