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헌 목사
▲김경헌 목사

김경헌 목사

(개금교회 담임, 학교법인 이사, 총회행정위원장)

이번 70회 총회에 ‘개혁교회 운동’에 관한 안건이 상정되어 있다. 이 운동이 얼마나 규모 있게, 그리고 조직적으로 전개되고 있는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 노회의 청원이니 이 운동의 실체는 분명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한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개혁교회 운동’, 이 말은 사실 귀한 표현이다. 우리 고신 장로교회도 세계 개혁주의 교회의 일부 아닌가? 이 운동을 종교개혁의 정신을 따라 교회를 교회답게 건설하자는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오히려 이 운동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을 가진 분들이 이상하게 보일 정도이다.

하지만 어떤 한 용어는 그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 혹은 집단이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가, 어떤 문맥에서 이용하는가에 따라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예를 들어 최근 10-20년 사이, 한국에서는 ‘개혁’, 혹은 ‘교회개혁’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하지만 이 말을 어떤 그룹에서 사용하는가에 따라 우리 고신 교회가 공식적으로 추구하는 역사적 개혁주의와는 그 본질과 내용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개혁교회 운동’, 이 용어는 과연 우리 고신 장로교회 내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까? 이 운동을 직간접적으로 일으키고 있는 분들은 어떤 의미로, 어떤 문맥에서 사용하는가? 이 용어는 과연 우리에게 적합한 용어인가? 오히려 혼란만 일으키는 부적절한 용어일까? 이 운동에 연관된 분들이 어떤 목적과 내용을 표명하는지 현재로서는 필자가 알 길이 없기에 그것을 분석할 처지는 안 된다. 이번 총회에서 이 부분은 적절하게 다뤄질 것으로 기대한다. 총회에 상정된 안건을 근거로 ‘개혁교회 운동’이라는 용어 자체의 적실성을 개혁교회와 장로교회 교회론 혹은 교회정치의 차이라는 관점으로 숙고할 수는 있겠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이 용어가 현시대, 우리 고신 장로교회 상황에서는 그다지 적절하지 않은 용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참고로, 필자는 우리와 자매 관계에 있는 개혁교회를 아주 귀하게 여긴다. 우리의 형제들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여러 가지 면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좋은 영향을 주며 교제할 가족이다. 이 점에 있어 오해 없길 바란다.

1.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교회정치 차이 1 : 명칭

일반적으로 개혁교회는 ‘교회’라는 명칭을 복수로 표기한다. 교회정치 161조에 따르면 우리가 자매 및 우호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개혁교회가 복수로 표현되어 있다: 화란 자유 개혁교회(The reformed churches in the Netherlands [Liberated]), 화란 기독 개혁교회(The Christian reformed churches in the Netherlands), 캐나다 개혁교회(The Canadian & American reformed churches), 호주 자유 개혁교회(The free reformed churches of Australia), 남아 개혁교회(The reformed churches in South Africa), 남아 자유 개혁교회(The free reformed churches in South Africa). 예외도 있다. 일본 기독 개혁파 교회(The reformed church in Japan)는 교회라는 명칭을 단수로 사용한다. 하지만 이 교회는 비록 선교과정에서 개혁교회의 영향을 받기도 했으나 일반적인 개혁교회가 아니라 장로교회라고 봐야 한다. 장로교회 표준 문서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 교리문답을 표준 문서로 받아들이며, 일반적인 개혁교회는 벨직 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그리고 도르트 신경을 ‘세 일치 신조’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인다.

이에 반해 장로교회의 명칭은 항상 단수로 표현된다. 교회정치 141조에 따르면 우리 교회의 영어 공식 명칭은 The Kosin Presbyterian Church in Korea이다. 우리와 우호 관계에 있는 미국 정통 장로교회(The Orthodox Presbyterian Church)와 미국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in America)도 모두 단수로 자신들의 이름을 표현한다.

교회 명칭이 중요할까? ‘교회’를 단수로, 혹은 ‘복수’로 표현하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할까? 이런 의문이 들겠지만, 이는 두 교회의 아주 중요한 교회론 혹은 교회정치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이 차이는 결코 이 두 교회가 같은 교단(회)가 될 수 없는 차이이기도 하다. 물론 두 교회는 정말 가까운 형제이고, 서로를 존중하는 친구이긴 하지만 말이다.

2.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교회정치 차이 2 : 교회 정의(Definition)

두 교회 교회론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교회’에 대한 이해에 있다. 개혁교회는 한 지역교회(a local church)가 교회이다. 우리가 흔히 OO 교회라고 부르는 각각의 지역 혹은 동네에 있는 교회가 바로 교회이다. 교회 아닌 교회가 있나? 물론 없다. 그렇다면 이 말은 무슨 의미인가? 각각의 지역교회가 그야말로 교회라는 말이다. 어감을 잘 살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각각의 지역교회가 바로 온전한(순결성에 있어 완전하다거나 완벽하다는 의미가 아닌) 교회이다. OO 교회가 온전히 교회라는 것이다. 왜 하나하나의 지역교회의 온전함을 강조할까? 이 각각의 교회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주신 모든 선물을 전부 담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개혁주의 교회들이 고백하듯 은혜의 방편인 말씀과 성례가 이 안에 있다. 그것을 담당하고 시행하는 직분이 있다. 예배가 있고, 다스림이 있다. 말씀을 통해 각양 은사가 제공된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본질, 내용, 모든 면이 모두 이 지역교회에 있다. 그래서 각 지역교회를 ‘교회(a church)’라고 부른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인 회중을 영어로 종종 congregation이라고 한다. 즉, 개혁교회에서는 a congregation = a church이다.

반면 장로교회는 개념이 다르다. 장로교회는 ‘노회’ 단위가 교회이다. 물론 후대 장로교회 정치의 모태가 되는 웨스트민스터 정치 모범을 보면 분명 노회를 교회의 회의들을 규정하는 부분에서 설명하고 있다. 노회가 치리회, 혹은 교회 회의라는 말이다. 특히, 이 중요한 장로교회 문서는 목사 직분, 그리고 목사 임직 항목과 더불어 노회에 대한 설명에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장로교회 교회정치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장로교회의 꽃은 노회이며, 장로교회는 바로 이 개념에서 출발한다. 이 규정에 따르면 ‘한 교회’는 ‘하나의 장로회(치리회)’를 가지고 있다. 이 ‘하나의 장로회’가 바로 노회이다. 영어로 표현하면 모든 세계 장로교회가 공통으로 사용하는 a presbytery이다. 따라서 노회 단위가 바로 ‘한 교회(a church)’이다. 장로교회에서는 이 개념이 핵심이기 때문에 웨스트민스터 정치 모범은 이것을 아주 길게 설명한다. 이 개념 아래에서 각각의 교회, 즉 개혁교회가 ‘지역교회’라고 부르는 교회들은 a particular church(개체교회) 혹은 a congregation(회중)이 된다. 즉, 이 개념 아래에서 ‘한 교회(a church)’는 여러 회중(several congregations)을 가지고 있고, 이런 의미에서 OO 교회는 온전한 교회가 아니라, 교회의 한 가지 혹은 지점(a branch), 혹은 비록 표현이 상스럽지만, 일종의 항목(a particular)이 된다. 이 원리를 그대로 적용하면 ‘부산 OO 노회’는 ‘부산 OO 교회’가 되는 셈이다.

우리가 출석하는 OO 교회가 온전한 교회가 아니라니? 별로 기분이 좋지 않다. 하지만 이것을 particular ‘church’라고 부른다는 것을 기억하자. 교회의 하나 됨, ‘한 교회, 한 치리’를 강조한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정치 모범’ 작성 당시 교회정치에 대한 치열한 논쟁으로 인해 ‘치리회’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정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한 지역교회의 온전성은 이 개념에서는 약화 될 수밖에 없다는 것도 기억해야 하며, 이에 대해 장로교회는 치열한 논쟁을 해야 한다.

이제 양 교회가 스스로 이름할 때 그 명칭의 차이가 있는 이유가 분명해졌다. 개혁교회(reformed churches)는 ‘교회들’의 모임이다.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는 ‘하나’의 교회이다. 이 말이 개혁교회가 장로교회처럼 하나에 대한 개념이 약하다거나 반대로 장로교회가 개혁교회를 하나 되지 못한 교회로 본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교회’에 대한 강조점의 차이가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좋겠다. 하지만, 이는 분명히 제법 큰 차이임에는 틀림이 없다.


3.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교회정치 차이 3 : 교회 회의

앞의 교회 정의에 대한 양 교회의 차이는 교회 회의까지 그 개념이 확대된다. 지역교회가 온전한 교회라는 개념의 개혁교회에서는 당회만이 상설회의이다. ‘치리회’는 ‘교회’에 있기 때문이다. 상설회의라는 말은 항상 운용되는 회의라는 의미이다. 지역교회의 보편성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따라서 노회와 총회는 임시회의이다.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칼빈의 말을 좀 더 자유롭게 표현하면 ‘회의’는 결코 교회가 될 수 없다. 교회들의 의제가 있을 때 노회와 총회로 모인다. 물론 정기적이다. 교회는 항상 여러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기적으로 모이는 임시회의’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따라서, 비록 정기적이지만 각 교회에 중요하고도 특별한 의제가 있다면 언제든 모일 수 있다.

반면 장로교회는 ‘노회’ 단위가 교회이기 때문에 ‘노회’와 ‘당회’가 상설회의이다. ‘당회’는 노회로부터 일종의 위임된 권한만 가지는 셈이다. 원리적으로 노회의 감독권이 강하다. 개혁교회도 노회의 ‘시찰’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형제간의 성경에 근거한 ‘무겁고 진중한 권면’의 성격이 짙다. 말씀의 권면과 다를 것이 없다. 그래서 구속력이 있다. 이 점에서 개혁교회는 회중교회와 차이가 있다. 이들에게 회의 결정사항은 의견에 불과하다. 구속력이 없다. 반면 장로교회는 원리적으로 ‘감독’의 성격이 짙다. 미국 북장로교회에서 그 유명했던 찰스 핫지는 장로교회는 ‘소교구 감독제’로 이해했는데, 이는 장로교회의 교회론과 정치를 제대로 이해한 것이다. 교회정치의 감독적 성격에 따라 교회를 분류하면 이렇게 되겠다. 독립교회 – 회중교회 – 개혁교회 – 장로교회 - 감독교회의 순서이다. 그리고 장로교회 정치 체제에서는 ‘총회’만이 임시회의이다.

종교개혁 이후, 장로교회를 창시한 선배들은 스스로 ‘가장 잘 개혁된 교회’라고 불렀다. 각 지역교회의 권세를 인정한 대륙의 개혁교회들보다 겉으로 보기에 장로교회는 교회의 하나 됨을 정치에서도 유지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이 말은 옳고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역사 속에서 장로교회는 그 정치 체제 강조점에서 비롯된 몇 가지 중요한 난점이 분명히 있다. 그중에 하나가 ‘총회’가 상설회의처럼 점점 변형되는 것이다. 노회의 감독 기능에 초점을 맞추면서 시작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고 필연적으로 노회보다 상회인 총회에 더 많은 감독 기능이 부여될 수밖에 없다. 우리와 가까운 한국의 어떤 장로교회 홈페이지에는 한때 “총회를 사랑합시다”라는 구호가 걸려 있었다. ‘노회=교회’라는 공식이 확대되어 ‘총회=교회’라는 공식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 개념의 자가발전은 소위 ‘총회주의’로 굳혀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한편으로 이것은 참으로 불안한 현상임이 틀림없다. 교권주의의 파도가 넘실대고 있는 셈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비판하는 목소리만 높다. 어떤 의미에서는 불공평하고, 무지하다. 왜? 장로교 교회정치에 대한 논의와 반성 없이 이 현상만 비판하는 것은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매일 같이 힘들게 일하는 부모님에게 왜 부모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냐고 질타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특히, 현재와 같이 긴박하게 돌아가는 사회에서, 그리고 교회의 빠른 대사회적 대응이 요구되는 시점에서 ‘총회’의 기능은 더욱 중요해졌고,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모두가 총회의 빠른 결정을 요구한다. 어떤 이들은 이런 시기의 총회 혹은 총회장 이름으로 나오는 결정에 대해 절차의 부당성을 이야기한다. 장로교회의 교회론에 근거해서 말이다. 하지만, 이 또한 장로교회에 대한 깊은 숙고가 없었던 것이라 볼 수밖에 없다. 총회 임원회 혹은 그에 필적하는 회의를 통해 나오는 총회 차원의 문서가 절차에 있어서 문제가 있다면 각 노회가 결정해서 발표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걸 노회장 이름으로 낸다면 그것은 교권주의가 아닌가? 이런 경우에는 교회들의 의사를 제대로 물어 처리한 것이 맞는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어쩌면 이 시대에 우리는 더 많은 총회의 역할을 기대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며, 점점 더 ‘총회주의’로 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이미 느끼겠지만, 필자는 장로교회의 노회가 교회라는 개념, 그리고 소위 ‘총회주의’의 위험성에 대해 염려하고 있다. 장로교회의 교회론 혹은 교회정치에 대해서는 다른 지면이 필요할 것이다. 어쨌든 이런 점에서 우리의 형제인 개혁교회의 교회 개념과 회의 개념을 잘 숙고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우리는 세상을 향해 교단(회) 차원의 목소리를 그리 많이 내지 않아야 할지도 모른다. 필요하다면 이 일을 위해 위임된 경험이 풍부한 선배들이 역할을 감당하면 된다.

장로교회와 개혁교회는 겉으로 보기에 비슷하거나 거의 같은 교회 정치 체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차이는 생각보다 크고 깊다. 여기에 필연적으로 추가되는 다른 차이도 제법 있다. 하지만 이 글의 주제를 고려해 이 정도만 하고 생략하겠다.

4. 우리 고신 장로교회 안에서 개혁교회 운동은 가능한가?

위에 언급된 차이점을 고려해서 답을 해보자. 가능한가?

장로교회와 개혁교회는 모두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 위에 세워진 개혁주의 교회이다. 넓은 의미에서는 모두를 개혁교회라고 부를 수 있다. 이것은 세계의 건전한 양 교회들 모두가 동의하는 바이다. 실제로 우리 고신 장로교회가 가입되어 활동하고 있는 ‘국제개혁교회협의회’의 영어 명칭도 The international conference of reformed churches이다. 이 협의회에는 우리 고신 장로교회와 더불어 많은 세계 장로교회들도 가입되어 있다. 이들 모두가 스스로 개혁교회의 한 부분이라 여기고 있는 셈이다. 이 회의에서 사용하는 reformed churches라는 용어, 온갖 사상이 난무하고 자유주의, 포용주의, 신앙 무차별주의와 같은 내용물이 즐비한 이 시대의 역사적인 문맥에서 이 용어는 그야말로 역사적 개혁주의를 추구하는 개혁교회, 장로교회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한 교회(파) 안에서 ‘개혁교회’라는 말은 아주 특별한 의미이다. 역사적으로 발전해 온 ‘개혁교회’라는 이름을 지닌 교회를 의미한다. 세 일치 신조를 고백하며, 지역교회의 온전성을 강조하고, 직분과 교회관에 있어 어떤 계서적(hierarchy) 개념도 거부하며, 성경과 신앙고백을 아주 소중히 여기는 교회이다. 따라서 그 어떤 개혁교회도 자신들을 ‘장로교회’라고 부르지 않는다. 세계의 역사적 장로교회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를 고백하며, 노회를 중심으로 한 교회의 하나 됨을 강조하고, 노회와 목사의 감독적 성격을 바른 것으로 여기며, 마찬가지로 성경과 신앙고백을 아주 소중히 여기는 교회이다. 그 어떤 장로교회도 자신들을 Presbyterian이라고 말하지, 개혁교회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개혁된 교회,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을 추구하는 교회라고 말할 뿐이다.

개혁교회는 우리가 함께 대화하고, 서로 배우며 존중할 귀한 형제이다. 서로 다른 교회라 하여서 하나가 아니지 않고, 각자의 교회를 잘 세운다고 하여 경쟁하는 관계가 아니다. 하지만 장로교회가 개혁교회를 세울 수 없고, 개혁교회가 장로교회를 세울 수 없다. 장로교회가 개혁교회 운동을 할 수 없고, 개혁교회가 장로교회 운동을 할 수 없다.

소위 개혁교회 운동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양 교회는 교리적인 부분에서는 거의 차이가 없다. 만약 교리적인 부분이라면 장로교회 운동을 하면 된다. 교회정치에서의 작지만 큰 차이 때문에 이런 운동을 하나? 교회론적으로 말이 안 된다. 총회 상정 안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 운동 이름으로 제기되는 문제들은 하나 같이 주변적인 것이다. 우리와 자매 관계를 맺고 있는 세계 여러 개혁교회도 이것을 문제 삼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부분이 눈에 보이는 개혁교회도 있다. 만약 이런 부분이 정말 문제가 된다고 생각한다면 장로교회 운동을 하면서 관용으로 건설적인 논의를 해 나갈 자세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한때, 그리고 지금도 한국에, 특히 우리 교단(회)을 비롯한 일부 건전한 개혁주의 바탕의 교단(회) 주변에는 개혁교회를 추구하는 분들이 제법 많다. 이들 중 어떤 이들은 개혁교회만을 참된 교회로 보는 아주 위험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 기존 장로교회를 거짓교회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개혁교회 교회론 원리에 따르면 이들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조금 이상한 무리에 지나지 않는다. 개혁교회는 ‘목사’가 개척하고 싶다고 마음대로 교회를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의 부르심(결국, 하나님의 부르심이다)과 파송, 철저하게 이것에 근거하여 교회의 모든 사역이 진행된다. 장로교회에서도 개척 시에는 노회에 청원하여 허락받는 절차가 있지만, 원리적으로 ‘목사’직의 중요성 때문에 거의 목사의 결정이 절대적이다. 하지만, 개혁교회는 그런 시스템이 아니다. 아무리 자신을 ‘개혁교회’라 이름하고 세 일치 신조를 받아들여도, 이것은 갑자기 생겨난 조금 이상한 무리일 뿐이다. 그래서 세계의 여러 개혁교회도 이런 교회들과는 곧바로 자매 관계로 들어가지 않는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개혁교회를 세우실 수 있다. 그래서 세계의 여러 개혁교회도 상당한 시간을 두고 살핀 후에야 자매 관계를 맺는다. 국제개혁교회협의회에 가입된 모든 개혁교회가 이민자들, 혹은 개혁교회의 선교를 통해 세워진 교회들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개혁교회 운동의 실체가 무엇인지, 어떤 조직이며, 어떤 활동을 하는지, 필자는 알지 못한다. 어쩌면 일부 목회자들의 개인적인 견해가 다수 표출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 ‘개혁교회’라는 용어는 이런 배경에서 정말 조심해서 다뤄야 한다. 왜냐하면, 넓은 의미에서 그것이 우리의 용어라 할지라도, 실제로는 우리의 용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장로교회’라는 용어가 있다. 계속 피력하지만, 필자는 ‘개혁교회’가 교회론과 교회정치에 있어 보다 성경에 가까운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개혁교회도 우리에게 배운다. 함께 논의한다. 존중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도 개혁교회의 소리를 들을 필요가 있다. 대신 우리는 우리 교회를 잘 세워야 한다. 치열하게 논의하고, 보다 성경에 가까운 장로교회로 건설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운동하려면 ‘장로교회 운동’을 하자. 아니면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 회복 운동을 하자. 개혁교회 진영에서 공부하고 온 선배들이 여러 방면에서 귀한 일을 했지만, 이 부분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이 아쉽다. 그래서 이런 안건이 상정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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