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철 목사(초원교회 원로, 부산외국어대학 초빙교수)

경남법통노회의 분리와 반고소로 분리된 경기노회와의 연합은 하나의 교단으로 가는 길이 되었다. 이들은 먼저 신학교 설립에 하나가 되었다. 해방 이후 한상동 목사가 고신교단을 창설하기 전에 고려신학교를 먼저 설립했던 것은 결과적으로 교단이 형성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마찬가지로 반고소 운동에 합류한 석원태 등은 하찬권이 시작한 학교를 인수하여 고려신학교를 설립하여 교단 조직의 통로로 삼았다. 하찬권이 이 학교를 시작할 당시에는 반고소 정신에 입각한 신학교라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하찬권을 배제한 이 신학교는 반고소 정신을 계승했다고 볼 수 없다. 


1950년대 성도 간의 불신 법정 송사 문제 처리에 대한 미흡한 대응이 결과적으로 1975년에 새로운 고려신학교를 설립하는 명분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신학교는 한상동, 주남선에 의해 1946년 설립된 이후 잠시 함께했던 박형룡과 결별하게 되었고, 박윤선도 예배당 명도 소송 등에 있어 견해 차이를 보이고 결국 자의든 타의든 고려신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이때 박윤선은 성도 간의 불신 법정 송사를 반대했다. 


결국 남아 있던 고려신학교는 후에 고려신학대학으로 승격되었다. 이 대학의 교수회가 성도 간의 불신 법정 송사가 가하다는 논문을 발표함으로 불신 법정 송사 문제에 있어서는 완전히 박윤선과는 반대 입장에 서 있는 학교임이 대내외적으로 천명되었다. 석원태의 주장처럼 반고소 고려신학교가 박윤선의 반고소 정신을 기초로 하여 설립된 학교라면, 이미 1950년대의 교권 대립 속에 고려신학교(반고소) 설립 내지는 계승이 예고되어 있었던 셈이다. 1975년에 고려신학교 설립에 관여한 인사들은 대내외적으로 고소 측인 고신 교단에 대해 자신들이 반고소 측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박윤선의 사상을 계승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1950년대 교권 대립의 과정에서 그리고 그 후의 고신 교단 내에서 제기된 송사 문제에 대해 명백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것이 하찬권과 석원태 등이 새로운 고려신학교를 설립할 수 있는 명분과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다.


이런 배경 속에서 1970년대 성도 간의 불신 법정 송사 문제로 인한 고신교단의 내분이 새로운 학교 설립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전술한 대로, 1950년대에는 교파가 다른 상황에서 불신 법정 송사가 진행되었지만, 1970년대에는 같은 고신교단 내에서 불신 법정 송사가 이루어졌다. 기존의 부산 고려신학교가 고려신학대학으로 승격했고, 이 학교가 반고소가 아닌 고소를 주장하는 학교이므로 석원태 등은 반고소를 주장하는 고려신학교로 복교한다고 천명하고 신학교를 시작했다. 하지만 고려신학교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학교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데, 명칭이 변경되었다고 마치 학교가 없어진 것처럼 ‘복교’라고 주장하는 것은 온당치 않았다.


이후 석원태는 고려신학교 설립의 역사적 배경을 회고하면서 자신이 반고소의 주역임을 강조하였고, 고려신학교를 서울에 복교한 이유도 고려신학대학교 교수들의 신자 간의 불신 법정 소송이 가하다는 잘못된 성경 해석에 있었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고려신학교 교수들과 자신의 교단에 소속된 목회자와 신학생, 성도들에 이르기까지 반고소 운동의 주역이 자신이라고 인식할 만큼 이 부분에 대한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또 신학생 모집의 효과를 위해 고신 교단이 소송을 철회하면 언제든지 고신 교단으로 복귀 내지는 합동한다고 천명해왔다. 이는 고신 교단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분리된 신학교와 교단이 생존할 수 있는 명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찬권이 세운 반고소 고려신학교는 박윤선이 고려신학교 초기부터 가르쳤던 반고소 사상을 계승하여 새로 설립한 학교라고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고, 석원태가 이를 정략적으로 계승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합당하다. 고신교단에서는 이런 반고소 측의 고려신학교를 역사적인 고려신학교와는 관련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복교’라고 볼 수는 없어도 설립자들이 고려신학교 출신이고 고신 교단 내에서의 불신 법정 송사 문제로 교단과 신학교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무관하다는 주장에도 무리가 있다. 결국 1970년대 고신교단이 불신 법정 송사를 감행한 것이 하찬권과 석원태에게 반고소 고려신학교를 설립할 수 있는 결정적인 명분을 준 셈이 된다.


이런 반고소 고려신학교는 사실상 하찬권이 시작한 신학교를 인수하여 설립한 학교이다. 하찬권의 ‘기독 신자 간의 불신 법정 소송 문제 연구’가 이미 전국 교회에 배포되었고, 하찬권은 반고소 문제로 총회와 노회에서 치리를 받은 상태에서도 고려신학대학 교수들이 발표한 ‘신학적으로 본 법의 적용 문제’가 비성경적이라고 주장하자, 학생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이 문제에 대해 총회가 답변할 것을 요구했다. 학생들은 만족한 답을 듣지 못하자 하찬권이 함안 지방을 중심으로 진행하던 반고소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고, 그 가운데 50여 명이 합류함으로 자신의 교회에서 신학교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 25년사: 반고소’에서는 40여 명의 신학생이 석원태를 찾아와 결국 고려신학교를 복교할 수밖에 없었다고 기록함으로 양측의 기술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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