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 권력, 명예의 욕망과 충족의 역사 -

, 권력, 명예. 이 세 가지가 항상 문제였다. 거룩한 말의 성찬은 가식의 페르소나일 뿐이다. 우리 내면의 은밀한 공간에는 이 세 가지에 대한 욕구가 항상 있었고, 이를 적절히 제어하지 못할 때 탐욕으로 발전한다. 이 세 가지에 대한 욕망과 충족의 긴장이 인간의 역사를 장식해 왔다. 얼마 안 되는 돈 때문에 골육상쟁이 일어나는가 하면 잠시 누릴 권력이나 명예를 위해 친구의 의를 배신한다. 따지고 보면 잠시 입었다가 벗어놓는 옷가지 같은 것에 불과하지만 그 권력에 목을 맨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일 뿐만 아니라 중세교회의 문제였다. 중세교회는 왜 부패했을까? 긴말 할 것 없다. , 권력, 명예에 대한 탐욕 때문이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6:10)라 하지 않았던가?

중세교회가 타락했다는 말은 직접적으로 말하면 성직자들의 타락했다는 뜻이다. 신학이나 교리의 문제는 그 다음의 문제였다. 중세 기독교는 거대한 권력 기구였다. 700여개의 교구를 거느린 이 기구의 수장은 막대한 부와 권력과 명예를 누렸다. 그래서 교황청은 그 자체가 음모와 모반의 온상이었다. 14세기 교황 요한 22(John XXII, 1316-34)금전 갈취의 천재로 불렸는데, 각종 징세제도를 창안하여 돈을 모았고, 성직을 매매하고 면죄부를 발행했다. 청빈의 이상을 단죄하는 여러 교서를 발표하였고, 가난이란 돈과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의미라고 해석하면서 부를 축척했다. 종교개혁 직전의 교황 알렉산더 6(1492-1503) 때의 도덕과 윤리는 최저 수준이었다. 그는 돈으로 추기경들을 매수하여 교황이 되었고, 17세의 아들 세사레를 발렌시아 대주교로 임명하고, 15살에 불과한 둘째 아들 후안을 추기경으로 임명했을 정도였으나 거룩한 성의를 걸치고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대리자연 했다.

교황청의 수입원은 두 가지였는데, 교황이 직할 영지(領地)에서의 수입과 기독교제국에 속한 나라에서 소위 영적인 봉사에 대한 대가로 교황이 걷어드리는 세금이었다. 그 외에도 광산 개발권과 같은 수입원의 확보, 면벌부의 판매, 성직 매매 등을 통해 돈을 모았다. 성직자들도 개인적으로 치부하기 위해 여러 직책을 맡았고 녹()을 독점했다. 이를 뒷받침 해 주는 제도가 겸직제도부재직임재도였다. 16세기 학자 루이스 스피츠에 의하면 종교개혁 당시 유럽토지의 3분지 1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등기되어 그 소유권이 교회에 속해 있었다고 한다. 탐욕에는 한계가 없다. 교회와 성직자들의 부에 대한 욕망은 돈 받고 팔수 있는 자리를 창안했는데, 그것이 성직 매매와 면벌부의 발행이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라틴어 Radix Omnium Malomum Avaritia의 두 문자 ROMA 라는 풍자가 유행했다.

그래서 중세 하의 개혁자들이 한결같이 공격했던 것이 성직자들이 부와 권력에 대한 탐욕이었다. 아마도 그 첫 인물이 브레스치아의 아놀드(Arnold of Brescia, 1100-1155)였을 것이다. 교회의 부패가 13세기 이후 더욱 심화되지만 이미 11세기에 교회의 속화를 비판하고 초대교회적 이상을 제시하면서 두 가지 쇄신을 요구했다. 첫째는 교회의 세속 지배를 반대했고, 둘째 교회와 성직자들이 돈에 대한 탐욕을 버릴 것을 요구하면서 사도적 청빈(apostolic poverty)을 주창했다. 청빈을 주장한 것이 금욕적 이상 때문이 아니었다. 의로운 호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질서를 파괴하는 자로 정죄되어 1155년 화형을 당하고 만다.

그의 뒤를 이은 이가 피터 왈도(Peter Waldo)였다. 프랑스 리용 출신인 그는 세욕에 물든 교회에 대한 쇄신운동으로 부의 추구와 권력에의 탐욕을 비판하고 청빈한 삶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그는 이단이 되었고 그를 따르던 왈도파 사람들은 처절한 죽음을 맞아야 했다. 그 수는 약 10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탈리아 파두아의 마르실리오(Marsilio of Padua, c.1275-1342) 또한 평화의 수호자(Defensor Pacis)라는 책에서 그리스도는 지상의 권력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는 세속권력을 가져서는 안 되고, 교회가 행사해야 하는 유일한 권력은 본질상 영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교회의 세속적인 권력과 물질적 소유가 모든 불화의 원인이라고 지적하면서 교회는 가난해야만 한다고 했다. 그도 교황 요한 22(John XXII, 1316-1334)에 의해 이단이 되었다.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가 그 뒤를 이었다. 국가의 세속권력 장악과 물질적 탐욕을 교회의 적폐로 간주하고, 교회는 이로부터 자유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후스는 1415년 화형을 당했고 위클리프의 무덤은 파헤쳐져 남은 뼈 조각이 화형에 처해졌다. 그들은 교회의 문제를 정확하게 보고 있었다. 그로부터 100년 뒤 루터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해답은 복잡하지 않다. 우리 한국교회가 부와 권력과 명예로부터 자유 할 수 있다면 한국교회는 영성을 회복하고 교회를 쇄신할 수 있을 것이다. , 힘 있는 자리, 명예, 대한한 것 같지만 잠시 입고 벗어놓는 옷가지와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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